한국 경제에 퍼펙트 스톰(여러 악재가 겹친 초대형 위기)이 몰려오면서 내년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기관들이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2.0%로 하향 조정하면서 1%대로 추락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를 인상하며 글로벌 무역전쟁을 촉발할 경우 수출이 견인해온 한국 경제는 잠재성장률을 밑돌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전례없는 위기론 속에 SK그룹과 롯데그룹 등 국내 주요 기업의 신용 등급 하락 우려까지 겹치며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 꺼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 경제에 ‘1%대 성장률’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성장률이 2.0% 미만(1981년 이후 기준)을 기록한 건 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5.1%), 금융위기 발생 이후 2009년(0.8%),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2020년(-0.7%)과 2023년(1.4%) 네 번밖에 없었다. 내수 회복세가 더딘 가운데 수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지만, 건전재정 기조로 정부의 지출 여력이 제한돼 현재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단도 마땅찮은 상황이다.
20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IMF 한국미션단은 최근 2주간 진행한 연례협의 결과 발표에서 내년도 한국 경제 성장률이 2.0%에 근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 10월 전망치(2.2%)에서 0.2%포인트 하향 조정된 것이다. 라훌 아난드 한국미션단장은 “(내년) 경제전망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며 위험은 하방 리스크가 더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내년에 한국이 잠재성장률(물가 상승 유발하지 않는 수준에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장률) 수준의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주요국 성장세 하락 등이 현실화할 경우 한국의 성장률이 1%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IMF는 한국의 올해 성장률도 10월 전망(2.5%) 대비 0.3%포인트 낮은 2.2%로 내려 잡았다.
내년 성장률의 하방 위험을 키우는 가장 큰 요인은 수출 불확실성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운동 당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 인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중국 수입품에 대한 60%의 고율 관세 부과나 모든 해외 수입품에 대한 보편관세 10~20% 부과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을 포함한 주요국이 보복조치에 나서는 등 통상 마찰이 발생할 경우 세계 교역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치명적이다. 2023년 한국의 실질성장률(1.36%) 중 수출기여도는 1.17%로, 한국은 전체 경제성장의 86.1%를 수출에 의존했다. KDI는 최근 ‘하반기 경제전망’을 통해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2.0%로 낮추면서 내년 수출 증가폭(2.1%)이 올해 전망치(7.0%)의 3분의 1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발 관세 전쟁은 현실화할 조짐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2기 행정부 첫 상무장관으로 관세 강화 정책을 옹호하는 하워드 러트닉 캔터 피츠제럴드 최고경영자(CEO)를 19일(현지시간) 공식 지명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그는 추가적으로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맡으면서 관세 및 무역 의제를 이끈다”고 밝혔다.
러트닉 상무장관 지명자는 트럼프 당선인 취임 후 변화가 예고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과학법 등 우리 기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법안의 재조정을 맡게 된다. 러트닉은 암호화폐에 친화적인 억만장자 금융 자산가로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강화 및 제조업 기반 강화 공약을 적극 지지해왔다. 그는 대중 강경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경상수지나 통화 불균형도 관세 부과 대상을 선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마이클 비먼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보는 19일(현지시간) 한미경제연구소(KEI)가 주최한 ‘한·미 경제협력 세미나’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인상 기준과 관련해 “(트럼프 2기에서) 우선 누가 벌금(관세)을 물게 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무역 불균형뿐 아니라 경상수지의 대규모 불균형, 통화 문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 대한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912억5000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 역시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 인상의 ‘타깃’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대내 불안요인 역시 적지 않다. 한국신용평가는 전날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와 함께 주최한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3분기 누적 기준 국내기업들이 수급 악화, 수요 둔화, 부동산 경기 부진 등으로 석유화학과 건설 업종을 중심으로 신용도 저하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건 한국신용평가 총괄본부장은 “향후 신용도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등급 전망 현황을 살펴보면 ‘긍정적’ 전망은 5개 업체, ‘부정적’ 전망은 24개 업체로 내년에도 신용등급 하향 기조는 계속될 것”이라며 “경제 불확실성 증대 요인과 부동산 경기 부진 등 영향으로 기업 실적 회복 폭이 크지 않을 전망이어서 당분간 신용도 하향 우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업종별로 석유화학과 이차전지, 철강, 정유, 호텔·면세 사업에서의 수익성 저하가 예측됐다. 특히 석유화학과 이차전지, 철강은 글로벌 수요 부진과 중국 경기 불확실성·공급과잉,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신평은 롯데그룹의 경우 그룹 운영사 대부분이 내년 업황이 악화될 것으로 예측되는 유통, 석유화학, 건설 등이라는 점을 들어 주요 모니터링 대상으로 보았다. SK그룹 역시 이차전지 사업 전개과정에서의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지만 성과 지연에 따른 재무 부담을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수 경기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 중 하나인 건설업의 경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회복이 제한적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위지원 한국신용평가 구조화평가본부 실장은 “내년 상반기까지 본 PF 이전 대출인 브리지론에서 15% 내외의 추가 부실이 예상된다”고 짚었다.
글로벌 관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 생산과 수출 구조를 미국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경영학)는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대로 미국에 공장이 없는 해외기업에 10% 수준의 높은 관세 부과를 부과할 경우 국내에는 62조원 규모 수출 감소가 예상된다”며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고 중국 생산을 줄이는 방식으로 수출 구조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해외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기술 혁신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는 식으로 기업들이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