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뇌/셰인 오마라/ 안진이 옮김/ 어크로스/ 2만원
미국인 헨리 몰레이슨은 10살이던 1930년대부터 뇌전증 발작을 겪었다. 당시 의료계에서는 뇌의 해마를 제거함으로써 뇌전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겼다. 27살이 된 헨리는 실험적 뇌 수술을 받았다. 뇌의 좌우에서 해마를 절제하고, 편도체를 제거했다.
수술 후 헨리의 뇌전증 발작은 상당히 개선됐다. 지능지수도 괜찮았다. 오랜 기억을 떠올리거나 생각하고 주의를 집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새로 접한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방금 들은 전화번호는 똑같이 말할 수 있었지만 이를 나중에 생각해내지 못했다.
헨리는 최근 얻은 정보로 현재를 해석할 수 없을 뿐더러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도 부족해졌다. 기억이 쌓이지 않고 현재만 사는 인간이 된 셈이다. 그는 연구자들과 수차례 만났지만 매번 처음 본 듯 원점에서 관계를 맺어야 했다. 동시대에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고 베트남전이 벌어졌지만 헨리는 이런 대화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학술문헌에 HM이라는 머리글자로 표기된 그는 기억에 관한 현대적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저자는 대화를 “우리 자신의 기억과 언어를 지원하는 뇌 시스템과 상대방의 기억과 언어를 지원하는 뇌 시스템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으로 정의한다. 말이 넘쳐나는 현 시대에 대화 능력이 뭐 대단할까 싶지만 이 책의 설명을 보면 대화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인간은 ‘고양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뇌로 이해하는 동시에 발화한다. 입과 목의 근육을 정밀하게 조정해서 각 글자의 소리를 정확한 순서로 낸다. 뇌는 매우 신속하게 근육의 움직임을 계획했다가 정밀하게 실행한다. 말하기는 얼굴, 턱, 혀, 후두의 근육을 조화롭게 움직여야 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말이 오가는 대화도 정말 복잡하다. 일상 대화에서 사람들은 서로 차례를 지켜 말한다. 상대가 한마디하면 나도 지루해지지 않을 길이의 문장을 말하고 상대는 또 말을 이어받는다. 저자는 “대화에서 차례가 지켜진다는 것은 신경 메커니즘의 지원을 받아 언어를 생성하는 동시에 이해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하루에 몇 시간을 차례 지키기에 사용하며, 무려 1500번이나 대화의 차례를 바꾼다.
두 사람이 대화할 경우 일반적으로 한 화자가 멈추고 다음 화자가 말을 시작하기까지 간격은 0.2초 정도다. 이 반응 속도는 총알이 발사될 때의 최소 반응 시간에 가깝다. 게다가 대화는 총알 발사보다 훨씬 복잡하다. 일반적인 대화라면 자기 차례가 됐을 때 말하는 시간도 대략 정해져 있다. 2초 정도다. 자기 차례에 재빨리 말을 이어가려면 상대가 말하는 동안 그의 말을 아주 빠르게 예측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듣고 있는 문장의 끝이 질문일지 제안·부탁일지 아직 몰라도 처음 1초 안에 상대방의 반응과 내용·의도에 대한 예측을 끝낸다.
고난도 과정인 대화를 통해 인간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공통의 기억을 구축한다. 인간의 기억은 현실을 그대로 녹화해 재생하는 비디오테이프와는 다르다. 내 기억을 표현하면서 상대의 기억을 듣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로 기억이 재작성된다.
저자는 “대화를 통해 기억은 미묘하게 비틀리고 갱신된다”며 “사회집단 내에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용히 덮어쓰기와 갱신이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서로의 머릿속에 최대한 깊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저자는 기억이 뇌나 세상 한 쪽에 있다는 주장은 이분법적이라며 “기억은 뇌와 세상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고 못 박는다.
저자는 기억과 대화의 본질에서 시작해 집단 기억의 형성, 사회와 국가의 작동까지 논의를 확장한다.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기억과 대화를 통해 우정을 쌓고 집단, 팀, 조직, 기구, 국가를 형성한다”는 점. 저자는 “기억은 대화를 거쳐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간다”며 “이런 기억의 전이는 사회적·문화적 관행의 기초가 돼 우리를 더 큰 사회집단으로 묶어주고 국가라는 상상 속의 공동체에 헌신하게 한다”고 분석한다.
인간이 ‘협력하는 종’이기에 갖는 힘과 언어의 중요성은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이 책은 이를 뇌과학의 연구 성과로 본 기억과 대화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