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스타벅스, 코카콜라 ···. 다국적 기업의 상표들이 여러 신들의 형상을 그린 신중도(神衆道)에 녹아들어 있다. 108위 신을 그리는 작가 지민석의 ‘백팔신중도(百八神衆道) 프로젝트’ 일환으로 그려진 그림들이다.
지민석은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예술가다. 과거 샤머니즘이 돌, 나무, 산 등 우리 주변의 것들을 통해 인간 세계와 신들의 세계를 잇는 것이었다면, 작가는 지금 우리를 초월적 세계로 이끄는 현대적 샤먼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한다. 도시의 삶을 누리는 다국적 기업의 상표 이미지들은 작가의 작품에서 인격화된 신으로 등장해 신화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한국 전통 샤머니즘과 현대 상표 이미지가 결합된 도상으로, 작가가 직접 만들어낸 상표별 상형문자의 문자도(文字圖)와 대응한다.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의 양식을 빌어온 것이다. 신중도, 문자도, 백수백복도를 현대적으로 번안한 작가의 작품은 오늘 우리 사회와 우주관을 돌아보게 한다.
작가 김재민이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오며, 도시 변두리나 사회 주변부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조사한다. 그는 조사 대상의 사고체계와 문화를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체화하여 창작의 기제로 삼는다.
작품 ‘소인 연구 중간 발표 - 소인에게 사랑을’(2024)은 대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낮추어 부를 때 칭했던 ‘소인’, 소위 ‘쇤네(소인네)’라고 불렸던 소인의 현대판 사례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다. 작가는 실제 ‘대한소인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으로 활동한다. 소인으로 자칭하는 민중의 성격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소인은 집단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조바심을 내며 존중과 관심을 갈구하는 등 여러 특징을 보인다. 과거 조선의 소인에서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소시민의 양태를 연구한 작가의 자조적, 해학적 시선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며, 전문 예술의 경계에 재치 있는 균열을 낸다.
임영주는 한국의 설화나 전설, 미신 등의 사례 연구를 예술 실천의 연장선 위에 놓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유사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작업들은 작가가 탐구하는 세계의 영매 구실을 한다. 작가는 우리 주변의 현상과 믿음에 대해 관찰하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이 닿지 않는 시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현대 소비문화 안에서 액운을 막거나 세속적 믿음의 대상이 된 것들을 풀어낸 그의 작품들은 전시장의 한 부분을 미신 혹은 믿음의 장(場)으로 전이시킨다.
‘애동’(2018)은 애국가의 “동해물과”에 해당하는 단순음을 반복하며 애국가 영상에 등장하는 촛대바위 모습을 비춘다. ‘야동’과 유사한 제목의 작품은 일명 ‘해꽂이’라 불리는 해돋이 경관의 명소 촛대바위에 덧씌워진 성적 코드와 숭배의 현상을 담는다. 반대쪽에 설치된 ‘인증샷_푸른 하늘 너와 함께’(2018)는 영상 속 인물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낯익으면서도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이끈다. 맞은 편 ‘요석공주’(2018)는 보다 본격적으로 설화와 믿음,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원효대사와 인연을 맺은 요석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 역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서사를 은유와 상징의 이미지들로 엮어낸다. 짧은 영상들이 스치며 신화나 인터넷 소문처럼 실체 없는 이야기들을 띄운다.
현대미술과 옛 그림의 조우, 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이 ‘알고 보면 반할 세계’라는 문패를 내걸고 내년 2월 23일까지 안산 경기도미술관에서 관객을 맞는다.
작자 미상의 전통 민화 27점과 함께 현대미술 작가 권용주, 김상돈, 김은진, 김재민이, 김지평, 박경종, 박그림, 백정기, 손기환, 손동현, 오제성, 이수경, 이양희, 이은실, 이인선, 임영주, 조현택, 지민석, 최수련 등 19인의 작품 102점이 내걸렸다.
전통 민화에는 나와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장수하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탐스러운 과일과 쌍을 이룬 새, 화려하고 옹골진 꽃과 나무, 신비로운 기물과 풍경, 넝쿨진 포도는 다산(多產)과 번성의 염원을, 영험한 동물로부터는 액운(厄運)을 떨치고자 하는 바람이, 덕목을 다지는 문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있다.
깜짝 놀라 휘둥그레 눈을 뜬 호랑이, 털이 쭈뼛 선 호랑이, 이러한 호랑이를 지켜보고 있는 야무진 까치, 민화의 호작도(虎鵲圖)는 익살스러운 동물의 모습이 등장한다. 벽사(辟邪)의 상징을 지닌 호랑이도 양반이라는 비유가 덧대어지면 위계를 해학적으로 전복하는 시도로 읽힌다.
호작도 외에도, 민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나 상황들은 각각의 재치 있는 형태로 세상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산업사회의 산물과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작품에 도입해 고상한 예술의 경계를 위트 있게 전복한 팝아트의 태도도 이러한 접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시작들은 사회와 삶을 관찰하며 권위와 부조리를 초극하고 풍자로 묘사한 세상살이의 이야기, 미(美)의 전통적 기준을 기지 있게 반전시킨 시도를 보여준다.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민화 화집과 팝아트, K문화 관련 연구 자료 등을 열람할 수 있다. 민화와 팝아트, K팝아트의 열린 개념 사이에서 알고 보면 반할 세계, 알고 보아야 반할 세계, 그리고 알고 보면 새로이 보일 세계로 들어가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