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권력교체기를 맞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북한군 파병에 대응해 자국산 중·장거리 미사일 사용 제한을 풀자 우크라이나는 이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했다. 러시아는 여러 개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극초음속 중거리 미사일을 쏘며 맞불을 놓았다. 국제사회에서는 이 전쟁이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며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거나 핵전쟁이 현실로 닥치는 게 아니냐는 공포가 퍼진다.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은 이런 확전 상황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차기 대통령의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바이든은 ‘미국이 돌아왔다’는 말이 상징하듯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대치하는 세계에서 민주주의 세력들이 뭉쳐 권위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는 설명이다. 조 전 원장은 “미사일 타격 허용과 대인지뢰 공급이 이 연장선에 있다”면서 “하지만 임기가 다한 상황에서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미 국민이 이미 우크라이나 지원을 더 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미 제일주의를 선택했다”며 “바이든의 이런 정책은 폐기될 것”이라고 했다.
조 전 원장은 한국의 무기지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명분과 실익이 분명치 않다”며 “이미 끝난 바이든에 보조를 맞추는 건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전쟁에서 일차적 책임은 유럽연합 회원국이고 이곳을 꼭 지켜야 한다면 그들이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조 전 원장은 “한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며 “우리의 이익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터뷰는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두 시간가량 진행됐고 25일 추가 질의와 응답도 이어졌다.
―트럼프 재집권의 세계사적 의의는.
―그래서 트럼프가 백악관 고위직과 내각을 충성파 인물로만 채우는 것인가.
“그렇다. 2기 때 미 제일주의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캠페인의 철학을 이해하고 실현하기 위해 뛸 인물로 쫙 채우고 있다. 트럼프 입장에서 이들은 잘못된 질서를 뒤집고 미 제일주의를 실천하는 전사다. 트럼프는 법무부 장관에 내정했던 최측근(맷 게이츠)이 성 비위 의혹에 낙마했지만 자신의 법률팀에서 일했던 충성파(팸 본디)로 교체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사건을 방어하던 변호사 3명도 법무부 부장관과 차관, 수석차관보 등 고위직에 임명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빨리 끝날까.
“트럼프가 들어서면 전선은 좀 조용해지겠지만 당장 평화가 찾아오기 쉽지 않다. 러·우는 6·25전쟁처럼 3년째 싸우면서 수십만명이 죽었고 서로 증오, 적개심이 넘친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던 유럽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도 내부협의와 입장 정리가 필요한 만큼 전쟁이 길어질 수 있다. 트럼프는 나토가 과도하게 우크라이나까지 확장하려다 전쟁이 생겼다고 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찬성할 리 없다.”
―정부가 무기지원을 검토하고 있는데.
“우리가 무기지원으로 얻는 명분과 실익이 분명치 않다. 무기지원도 전쟁에 가담하는 것인데 우크라이나 편에 서서 러시아에 피해를 주기 위한 행동이다. 우리는 그간 중·러와 관계를 강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왔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언젠가 통일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고 한반도 평화 관리 과정에서 중·러가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하지 않는 게 맞다.”
― 북·미 협상이 재개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트럼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핵보유국 인정을 전제로 군축회담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너무 성급하다. 군축 협상 말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 군축하려면 북한이 핵무기 국가라고 인정돼야 하는데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가 유지되면 핵 군축 회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생각은 북한의 현재 핵 상태와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핵 폐기) 사이 중간 어디엔가에 있을 것이다. 이행과정에서 핵 능력 수준과 속도를 고려해야 하고 수많은 조합이 가능하다. 트럼프도 동맹인 한·일을 완전히 버리고 미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싹 제거하고 손들고 나갈 수는 없다.”
―주한미군 철수도 논의될 수 있나.
“트럼프는 세계경찰 노릇을 하는 해외 미군을 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1기 때 중동과 유럽에서 미군을 철수하거나 줄였다. 2기 때는 한국 등 동아시아에 손을 댈 거 같다. 미국은 6·25전쟁 이후 한국의 역량과 한반도 평화 진전상황에 맞춰 주한미군을 조금씩 줄여왔다. 트럼프라고 해도 이 두 가지에 아무 변동이 없는데 2만8500명의 주한미군을 다 뺄 수는 없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만나 북한의 위협을 줄인다면 여지가 생긴다. 우리가 재래전력을 강화한다면 미국은 약간의 병력을 본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 트럼프는 1인당 국민소득이 6만달러(구매력 기준)나 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나라가 무슨 일만 있으면 미국에 기대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 의존해 방위하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방위비 분담 증액은 어떻게 전망하나.
“바이든 행정부에서 방위비 분담 협상에 합의했다고 해서 끝난 일이 아니다. 트럼프는 다시 협의하자고 할 것이다. 트럼프를 그냥 돈에 눈이 먼 사람처럼 봐서는 안 된다. 트럼프 얘기의 핵심은 미국이 이제 세계경찰 노릇을 하지 못하니 당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이제 국방비를 더 늘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해야 한다.”
―독자 핵무장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
“독자 핵무장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가 전쟁발발 때 동원할 수 있는 군사역량은 재래전력과 핵전력 두 가지다. 지금까지 핵전력은 미국이 제공하고 재래전력도 미국이 많이 관여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어디를 강화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핵연료재처리나 우라늄 농축 등 아무것도 못 하면서 핵무장 얘기는 정상적이지 않다. 우선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부터 요구, 사용 후 핵 원료 재처리 권한부터 확보해야 한다.”
―윤석열정부의 가치외교가 트럼프 2기 들어 시험대에 오를 거 같다.
“트럼프가 미 제일주의를 밀어붙이면 중국, 일본 등도 따라 할 것이다.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한다. 현재 세계는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옮겨가고 있다. 브릭스(BRICS)의 경제 규모는 2022년 주요 7개국(G7)을 추월했고 UAE, 이란, 인도네시아 등이 가입했다. 우리 외교는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넘어 전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얼마 전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는 정책 선회의 고민이 담긴 듯하다. 양국은 방위비분담부터 미군철수, 남북대화, 제조업 재건 및 국제분업체계, 과학기술 이전 등에 이르기까지 논의해야 할 게 많다. 윤 대통령이 이런 의제를 다 올려놓고 통 큰 협상으로 국익을 관철해야 한다.”
―미·중 관계는 어떻게 될까.
“미·중 관계가 처음부터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을 거다. 트럼프는 1기 때 500억달러어치 제품의 관세인상부터 시작했다. 이번에도 트럼프는 나를 보호하되 상대방에게 가장 많이 피해를 주는 분야부터 순서를 밟아나가며 새 무역협정을 만들 거다. 중국도 나름 게임플랜을 만들고 트럼프의 약점을 파고들 것이다. 트럼프 지지층에는 미 중서부 농·축산 농가가 많은데 중국이 밀, 옥수수, 소고기 등의 수입을 금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