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한낮, 나는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겉옷을 고르다 점심 약속에 늦은 탓이었다. 핫팩을 챙겨 코트 주머니에 넣은 뒤 나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공원 놀이터를 지나려는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쥐어패 버린다!” 뭐라고? 나는 엉겁결에 멈춰 섰는데,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화난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우렁우렁 사방이 울린 탓이었다. 낮은 덤불 너머로 보이는 놀이터에는 남자아이 둘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소리친 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링 위에 선 것처럼 조금 물러섰다 앞으로 와락 다가서는,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마주 선 아이 체구가 워낙 왜소한 탓에 소리친 아이의 상체가 유난히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소리친 아이가 손에 쥔 생수병을 흔들어댔다. 나는 덤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 놀이터 쪽으로 들어섰다. 주위에 어른이 있을 때 폭력을 쓰진 않겠지 싶어서였다. 혹시 생수병이나 주먹으로 아이를 내리친다면 잡아 말릴 심산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아이들 사이가 가까워졌다. 소리친 아이가 두 손을 번쩍 들어 크게 걸음을 내딛더니, 그대로 작은 아이를 끌어안은 것이다. “나랑 또 놀자.” 여전히 씨근덕대며 아이가 말했다.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라 정확히 듣진 못했지만 나랑 또 놀자 내지는 나랑 더 놀자, 그 언저리의 말 같았다. 작은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나는 뭔가 겸연쩍어진 상태로 놀이터를 돌아 나왔다. 순간적으로 화가 난 것일 뿐 아이들은 화해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대뜸 끌어안은 뒤 사과라니, 무모하고 정직한 게 초등학생에게 꼭 어울리는 화해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어가던 나를 도로 멈추게 했다. 갑작스레 화해라니, 너무 부자연스럽잖아? 어른이 다가가니까 잠깐 연기한 거 아냐?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머릿속에서 생수병이 와그작 찌그러지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놀이터로 돌아가 보니 정작 두 아이는 나란히 미끄럼틀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