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대영제국과 신흥강국 독일의 건함(建艦) 경쟁은 치열했다. 독일이 부상하기 전 영국 해군력은 독보적이었다. 1902년 영국 전함의 총톤(t)수는 106만5000t으로 당시 2, 3위국인 프랑스(49만9000t)와 러시아(38만3000t)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영국은 식민지시대 해군력 유지 전략으로 ‘2강 기준(Two-power standard)’원칙을 채택하고, 2, 3위 해군력 보유 국가보다 더 많은 전력을 유지했다. 독일은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해군력 증강에 나섰다. 1914년 1차 대전 직전까지 이어진 건함 경쟁은 국제 정세를 극도의 긴장 속으로 몰고 갔다. 독일의 추격에 불안감을 느낀 영국이 ‘힘의 균형’을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았고, 이는 1차 대전 발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100년 전 영국과 독일 못지않게 미국과 중국의 건함 경쟁도 치열하다. ‘트럼프 집권 1기’ 때인 2020년 미 국방부는 미 해군 미래 전력 증강계획 ‘2045년 전력 계획’(Battle Force 2045)을 발표했다. 2045년까지 미 해군을 최대 80척의 핵잠수함을 포함해 유·무인 함정 500척 체제로 개편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미 언론은 “중국의 점증하는 해상 도전에 맞서기 위한 미 해군의 야심 찬 계획”이라고 했다.
중국 해군력은 미군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근접했다. 중국은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함에 이어, 독자 건조 항모인 산둥함을 2019년 실전 배치하면서 쌍항모 시대를 열었다. 6척을 건조하게 되는 2035년쯤 중국 해군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 해군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해군함정 건조 속도는 미국의 건조 능력을 훨씬 앞섰다. 지난 6월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중국의 해군 구축 분석(Unpacking China’s Naval Buildup)’에 따르면 현재 전투함 기준 중국 군함은 234척, 219척의 미 해군보다 많다. 구축함은 미 해군이 73척을 보유해 중국의 42척을 앞섰지만, 건함 능력을 감안할 때 추월당할 가능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미 대선 승리 후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에서 조선업 협력을 언급한 것도 중국과의 건함 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미·중 건함 경쟁은 경제와 에너지, 외교, 소프트 파워 등 전 영역에서 일어나는 미·중 간 전략 경쟁을 상징한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부르든, 세력전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으로 부르든, 미·중 충돌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 셈이다. 미국의 동맹국인 우리로서는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국과의 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만큼 난처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당장 트럼프 2기 시대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정치적·외교적 카드로 이를 실제 사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주한미군 문제는 미군이 6·25전쟁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이후 미국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계속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미군은 6·25전쟁 직후 8만명 수준을 유지했지만 계속 줄어 현재 약 2만8500명이 주둔하고 있다. 또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 가능성도 있다. 대규모 기지 한 곳에 주둔시키기보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병력과 장비를 신속하게 다른 분쟁 지역으로 전개하겠다는 미국의 세계전략 전환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한반도 안보 지형이 불안전해지는 셈이다.
1000일이 넘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강하지 못하면 평화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무기를 지원하는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 승인이 없으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영토로 미사일 한 발 제대로 쏠 수 없다. 휴전을 압박하는 트럼프 당선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우크라이나는 국토의 20%가량을 러시아에 내준 채 종전을 맞이할 수도 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우리 안보 환경은 매우 엄중하다. 미국 주도 세계질서가 약화하고, ‘각자도생’의 국제 정세에서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복원한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돼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국지 도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안보 홀로서기의 각오를 다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