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정부효율부를 신설하고 공동 수장으로 일론 머스크와 기업가 출신인 비벡 라마스와미를 임명하겠다고 언급하였다. 미국이 위원회도 아니고 정부 부처를 신설하여 정부혁신을 해야 할 시급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민간 경영인 출신인 트럼프나 공동 수장들은 정부가 비효율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오랫동안 지니고 있을 법하다.
정부혁신의 역사는 제법 길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 집권 시 연방정부의 효율성과 경제성 개선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운영된 후버위원회(1947, 1953)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연방정부 예산을 수십억 달러 절감한 그레이스위원회(1982) 등이 떠오른다. 반면에 민주당인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운영되었던 대통령관리혁신위원회(1993)나 정부혁신과 성과 태스크포스(2009) 등은 정부 성과나 책임성 개선에 초점을 두었다. 언뜻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부혁신에 대한 관심이 다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영삼 대통령 시절 행정쇄신위원회를 필두로 초기의 정부혁신은 부처 통폐합이나 신설 등 정부 조직 개편과 구조 조정에 초점을 두는 하드웨어적 혁신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에 노무현정부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특히 박근혜정부 시절 정부3.0위원회는 인위적인 부처 통폐합보다는 문화나 일하는 방식 개혁과 같은 소프트웨어적 혁신에 방점을 두었다.
20세기 초 한정된 자원과 아직은 제도의 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방만하게 운영되는 정부를 보며, 미국 대통령의 관심은 좋은 정부를 만드는 것이었고, 당시의 좋은 정부는 능률적인 정부를 의미하였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경쟁력 강화와 생산성 향상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능률적인 조직 운영에 집중되었으며, 쉬운 예로 회사 근로자들이 하나의 부품을 능률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과 동작을 연구할 정도였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부의 효율성 향상은 중요하다. 그러나 효율성만 따지는 시대는 지났음을 정부혁신 역사가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미국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안정적으로 선전한 이유 중 하나로 미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엿볼 수 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치안이 불안한 이웃을 보면서 정치적 올바름을 쫓는 이상주의적 외침보다는 국가를 먼저 챙기는 강한 지도자를 무의식적으로 원했는지도 모른다.
정부 조직 축소와 인력 감축 그리고 재정 삭감 등 효율적인 정부를 만드는 것에 우선순위를 둘지 아니면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안전하게 만들며,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공동체 부활에 필요한 정책과 사업을 먼저 추진할지는 지극히 미국의 가치 판단이다. 판단의 결과를 미국민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모른 체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정부를 과연 국민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국민의 일상적인 삶이 정부가 있어서 행복하고 안전하며 편안하다고 느끼는지 자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혁신이 미국 정부와 궤를 같이할 필요는 없다. 정부 혁신한다고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며 편리성과 효율성을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나 근본적으로 정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매번 정부가 혁신한다고 외치지만 국민의 귀에 그다지 반갑게 들리지 않는 숨은 이유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