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염증 트럼프 재선 성공에도 한몫한 듯 부당함 바로잡기 대신 권력화돼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하자
꼴도 보기 싫은 대통령을 피하기 위해 과연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에 불고 있는 ‘트럼프 도피’ 이슈를 보며 든 의문이다. 최근 미국의 한 크루즈 회사는 이번 대선 결과에 실망한 이들을 위한 크루즈 상품을 내놨다. 1년짜리 패키지의 이름은 ‘현실 도피’, 2년은 ‘중간 선거’, 3년은 ‘집 빼고 어디든’이며 트럼프 임기 4년 내내 미국을 벗어날 수 있다는 초장기 패키지의 이름은 ‘도약’이다. 140개국 425개 항구에 기항하며 다음 대선이 치러지는 2028년 11월까지 미국에 돌아오지 않는 코스다. 가격은 약 3억5000만원부터 시작한다.
유명인들은 아예 미국을 떠나겠다고 나섰다. NBC의 간판 토크쇼 진행자였던 엘런 드제너러스는 동성 아내와 함께 런던 근교로 이주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기대했던 그녀가 선거 결과에 환멸을 느껴 영국행을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로 유명한 배우 에바 롱고리아는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은 디스토피아라며 당분간 미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겠다고 밝혔다. 라틴계 미국인인 롱고리아는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의 지지 연설을 하는 등 오랜 민주당 지지자로 유명하다.
반(反)트럼프 인사들이 이런 행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건 트럼프의 재집권에 대한 반감을 그만큼 강조하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좋든 싫든 하루하루 월세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직장을 그만둔다는 건 곧 가족의 붕괴를 의미하는 이들에게 도피 크루즈니 이주니 하는 건 ‘팔자 편한 소리’일 뿐이다.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이들과 어떻게든 이 땅을 지키고 살아내야 하는 이들의 대결. 후자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의 재선 성공에는 미국 사회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대한 피로가 한몫했다.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 약칭 DEI라는 진보적 가치는 민주당 해리스 후보와 그 지지자들의 모토였고 그 반대지점에 트럼프가 있었다. 문제는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아름다운 가치가 언젠가부터 ‘팔자 편한 소리’로 들리기 시작한 데 있다.
난민과 불법이민자에 대한 포용의 목소리는 정작 그들과 부딪쳐 살아가며 임금 경쟁을 해야 하는 이들의 절박한 하소연에는 등을 돌렸다. 흑인과 성소수자를 유독 성역화해온 PC는 아시아인 등 타인종에 대한 역차별을 불렀고, 초등학생도 부모 동의 없이 성전환 수술을 받게 하는 등 선을 넘기 시작했다. 특정 종교를 지칭한다는 이유로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 인사하며 눈치를 봐야 했고, 디즈니 영화 캐스팅은 물론 기업 채용, 과학 기금 배정 등 전방위적으로 DEI 지수가 반영되며 노력과 성과 대신 다양성(인종, 성별 등)이 기준이 됐다. 이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 스포츠 선수들이 여자 복싱 링, 여자 배구 코트에 뛰어들어 여성이 감당할 수 없는 무력을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이게 ‘올바름’인가.
애초에 PC의 시작은 부당한 차별에 따른 피해와 상처를 바로잡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남용되고 오용되며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고 괴물이 되었다. 그 반동 또한 만만치 않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드러낸 사람을 낙인찍어 집단으로 배척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의 사나운 위세는 이제 좌우를 막론한다. 지난해, 인종차별 낙인이 찍힌 몇몇 컨트리 가수가 PC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자 보수 진영이 뭉쳐 빌보드 정상에 올린 일이 있었다. 미국 내 부동의 1위였던 맥주 ‘버드 라이트’는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와의 협업 후 보수 진영의 캔슬 컬처 대상이 됐다. 중장년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불매운동이 확산되며 점유율 3위로 추락했다. 영화도 음악도 맥주마저도 정치세력화된 PC, 반PC의 전쟁터가 됐다.
1938년 블루스 가수 리드 벨리는 ‘스코츠보로 소년들’이란 곡을 발표했다. 여기에 ‘깨어있으라(stay woke)’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모티브가 된, 강간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지난한 싸움 끝에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아홉 명의 흑인 소년에게 헌정된 노래다. 이후 워크(woke)는 불의와 차별에 맞서 깨어있자는 의미로 쓰여 왔지만 현재는 과도한 PC에 대한 비판적 의미로 변질됐다.
리드 벨리의 노래를 다시 들어보자. ‘깨어있으라(stay woke)’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 있다. 바로 ‘눈을 뜨고 있으라(keep your eyes open)’는 주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시작된 ‘워크’가 조롱의 의미로까지 변질된 건 깨어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우기며 눈을 감고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넘어 오만과 독선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싫어하던 트럼프에게 정권을 넘겨준 이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미국을 떠나고 싶다는 한탄이 아니다. 더 크게 눈을 뜨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직시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