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방부가 장진호 전투 도중 철수하는 부대를 위한 엄호 임무 도중 산화한 해병대 병사의 74주기 기일(忌日)을 맞아 고인의 희생을 기리는 장문의 글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이 병사는 실종 상태에서 미군 최고 영예의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상했다. 이후 전사한 것으로 최종 판단이 내려졌으나, 안타깝게도 고인의 시신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2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에 따르면 제임스 존슨 해병대 병장은 1926년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州) 포카텔로에서 태어났다. 고교에 입학해 농구 선수로 활약하던 존슨은 17세 청소년이던 1943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으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 유럽에서 독일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존슨은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활약하고 1945년 종전과 더불어 제대했다.
이후 기계 공장에서 잠시 일하고 대학에도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존슨은 1948년 해병대에 다시 입대했다. 1949년 10월 결혼한 그는 이듬해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보내졌다. 1950년 8월의 일로 딸 스테파니가 태어난 지 불과 5일 만에 이별을 겪어야 했다.
존슨은 해병대 1사단 11연대에 배치돼 포병으로 복무했다.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된 뒤 그가 속한 부대는 두만강을 향해 진격하던 중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당시 궁지에 몰린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공은 대규모 부대를 은밀히 북한으로 보냈고, 이들은 장진호 일대에 매복해 중공군 참전 사실을 모르는 미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12월 2일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앞세워 미군을 공격했다. 당시 소총 소대 분대장이던 존슨은 소대장이 병사들을 지휘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소대장 대리까지 맡았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명령을 내리며 부하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잘 이끌었다. 미군 지휘부는 밀려드는 중공군 앞에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존슨의 소대에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면서 존슨으로 하여금 병사들이 후퇴하는 동안 엄호를 맡도록 했다.
존슨은 이 임무를 철저히 수행했다. 당시 퇴각하던 일부 병사의 눈에 존슨이 크게 다친 상태에서도 적군을 향해 맹렬히 사격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그게 전우들이 기억하는 존슨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았다. 존슨의 희생 덕분에 그가 이끌던 소대원들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미 행정부는 존슨의 용기와 전우애를 기려 명예훈장 수상자로 선정했다. 명예훈장은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에 해당한다. 다만 존슨이 실종 상태라는 점을 감안해 훈장 수여식은 그가 귀환하면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년 가까이 지난 1953년 11월 미군은 존슨이 전사했다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듬해인 1954년 3월 국방부 청사에서 존슨의 명예훈장 추서 행사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열렸다. 고인을 대신해 부인이 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시신은 아직도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국립 태평양 기념묘지의 실종자 명비에 새겨져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도 고인을 기리는 표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