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미셸 바르니에 총리 내각이 출범 두 달여 만에 최단기 붕괴 위기를 맞았다. 바르니에 총리가 2일(현지시간) 의회 표결을 건너뛰고 헌법 조항을 발동해 내년도 예산안 일부를 처리하자 반발한 야당이 즉각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면서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또 한 번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와 함께 프랑스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프랑스 야당인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과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은 이날 각각 바르니에 총리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같은 날 바르니에 총리가 헌법 49조3항을 사용해 내년 예산안에 속하는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의회 승인 없이 통과시키자, 해당 법안에 반대해 온 야당이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불신임안을 발의한 것이다. 프랑스 헌법 49조3항은 정부가 의회 표결 없이 예산안을 단독으로 입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데, 대신 24시간 이내에 의회에서 불신임안을 제출해 가결되면 법안 무효화가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문제가 된 사회보장 재정안은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재정 수입·지출을 관리하는 예산안이다. 바르니에 총리는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내년도 예산안에서 약 60조원의 공공지출을 절감하겠다는 목표로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했는데, 야당 모두 사회적 불평등 심화와 소비자 구매력 감소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프랑스의 올해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6.1%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불신임안은 제출 후 48시간 이내에 표결에 부쳐져야 하므로 이르면 4일 오후, 늦어도 5일에 투표가 진행된다. 전체 의원 577명 가운데 현재 2석이 공석이라 가결 정족수는 288명이다. 지난 7월 조기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NFP와 3위를 차지한 RN의 의석수를 합치면 300석이 훌쩍 넘는다. 반면 범여권의 의석수는 213석에 그친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내각은 즉각 총사퇴해야 한다. 지난 9월 말 바르니에 내각이 출범한 지 두 달여 만에 해산, ‘최단기 집권 정부’라는 오명을 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1958년 탄생한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불신임안이 가결돼 내각이 해산된 건 1962년 10월 샤를 드골 대통령 당시 조르주 퐁피두 정부가 유일하다. 당시 퐁피두 정부는 총사퇴했고 드골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한 뒤 조기 총선을 치렀다.
정부 붕괴가 현실화하면 프랑스 정국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 전망이다. 이미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6월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른 탓에 내각이 총사퇴해도 내년 6월까지 조기 총선을 치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이 6개월간 기술관료로 구성된 임시 내각을 구성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프랑스 의회가 분열돼 있어 새 총리 후임을 지명하는 데도 난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바르니에 총리 역시 의회의 정치적 교착 탓에 조기 총선 후 두 달이 지나서야 임명됐다.
경제적 혼란도 불가피하다. 바르니에 총리는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정부가 붕괴할 경우 “심각한 금융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실제로 유로존 2위 경제대국인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지자 이날 유로화 환율도 급락했다. 이날 파리 외환시장에서 유로화 환율은 1유로당 1.0470달러로 전 거래일보다 1.01% 떨어졌다.
프랑스 국채 금리는 상승하고 있다. 프랑스 국채에 대한 매도세가 강해지면서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2.7bp(bp=0.01%포인트) 상승한 2.923%까지 올라 그리스 수준에 근접했다. 유럽 내 대표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프랑스 국채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투자 부적격’으로 분류된 그리스 국채와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부가 붕괴하더라도 미국과 같은 ‘셧다운’(정부 업무정지) 사태는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는 평가가 나온다. 프랑스 헌법이 임시 내각에서도 전년도 예산안을 몇 개월 연장하는 긴급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