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직접 남긴 사료 ‘이풍암공실행록’ 첫 발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풍암 이병춘(1864∼1933)의 활동을 통해 당시 전봉준과 최시형 등의 활동 사항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새롭게 발굴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자 독립 유공자인 이병춘의 활동 내용을 정리한 자료인 ‘이풍암공실행록(李灃菴公實行錄’을 새로 발굴해 5일 공개했다.

 

이풍암공실행록은 이병춘의 손자인 이길호(천도교 전주교구장)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제공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됐다. 자료는 이병춘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활동 내용을 구술하고 그의 문하생인 김재홍이 자세히 정리하는 방식으로 총 112면에 걸쳐 국한문 혼용체로 기술돼 있다. 표지에 포덕(布德) 52년(1911년) 정월, 자료 말미에는 포덕 56년(1915) 10월로 기록돼 1911년 작업을 시작해 1915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풍암공실행록에서는 그동안 불분명했던 여러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93년 보은집회와 원평집회 당시 전봉준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지금까지는 불분명했는데, ‘四月(4월)에 更會于忠淸道報恩郡帳內(경회정충청도보은군장내)하야 始設倡義所(시설창의소)하니 其時(기시)에 古阜郡全琫準(고부군전봉준)은 亦會于全羅道金溝郡院坪(역회우전라도금구군원평)’이라고 기록해 전봉준이 원평집회를 주도했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894년 최시형의 활동 일자와 장소에 대해서도 1894년 10월 ‘至南原郡內眞田坊五山里權陽壽家(지남원군내진전발오산리권양수가)’라고 적시해 최시형이 이곳에서 머물렀음을 확인했다. 최시형의 이동에 이병춘이 직간접으로 관여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병춘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도 최시형과 함께 움직였다. 또 동학교도가 입도하는 방법과 시기, 접주로 임명되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병춘이 어떻게 동학을 접하게 됐고, 어떻게 접주로 임명되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실상과 교조신원운동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집회 관련 내용 등을 포함해 다량의 역사적 사실을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는 이 자료를 최근 발간한 학술지 ‘동학농민혁명 연구’ 3호를 통해서도 소개했다.

 

한편, 이병춘은 1864년 2월 전라도 임실에서 태어나 1888년 동학에 입도했고 1892년 12월 대정으로 임명됐다. 1894년에는 접주로 임명돼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는 천도교에서 천도교 전주 대교구장, 성도사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1919년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이런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은 “동학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한 이병춘의 기록을 통해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과 최시형의 동학교단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이 기록돼 있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