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천양희 “시인은 적막이라는 짐승을 기다리는 고독한 사냥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단풍이 풍경으로 솟구치던 어느 가을, 소나무와 기암절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담양 추월산에 갔다. 이때 산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고, 산으로 간 그의 몸과 마음 역시 단풍이 돼 물들고 있었다. 보름달에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높아 보이는 보리암과, 그 보리암 정상에서 내려다본 푸르디푸른 담양호.

 

이즈음의 시인 천양희는 사람보다는 자연에, 산에 더 많이 기울어 있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그를 위로해주고,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변함없이 그를 받아주는 것 같았다. 펑펑 울어도 말리는 사람도 야단치는 사람도 없었다. ‘아름다운 자연이 못 사는 친정보다 낫다’는 문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던 50대 초반부터 70대까지, 그는 산에 자주 갔다.

 

시름마저 펴주는 풍광과, 가슴속까지 태울 것 같은 단풍과, 푸르디푸른 담양호의 곡선을 몸과 마음에 담고 보리암 정상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멋진 단풍이 천천히 비에 젖어갔다. 문뜩 어떤 감정이 피어올랐다.

 

저렇게 아름다운 단풍조차도 비를 맞는구나. 단풍 자신이 비를 맞고 싶어서 맞는 것도 아닐 텐데. 단풍을 적시는 저 비 역시 내리고 싶어서 내린 것도 아닐 텐데⋯.

 

단풍과 비를 더 느끼고 싶어서, 그는 준비한 우비를 입지 않은 채 그냥 내려갔다. 걸어오는 동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젊을 때부터 비 맞는 것을 좋아해 웬만큼 오는 비가 아니면 우산 없이 그냥 나갔지. 힘든 일도 겪고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고 된 뒤에는 비를 맞고 걸어가는 자신이 보였고. 상처 없는 사람들은 햇빛 속을 잘만 걸어가는데 나는 왜 언제나 비 오는 길일까, 나는 왜 이렇게 젖으며 살아야 하나, 라고 원망하는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그치자, 다시 햇빛이 쫙 났다. 하늘은 더 맑아졌고, 풍경은 더 깊어졌다. 이때 문뜩 더 큰 것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아, 인생이라는 것도 비 오는 날도 있으면 햇빛을 비추는 날도 있기 마련이구나. 나는 왜 한 번도 햇빛을 생각하지 않고 비만 생각했단 말인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 피부 마디마디에서 분출하는 어떤 감정, 주체할 수 없는 감동. 이때의 정황과, 감정과, 마음을 서둘러 적었다. 내가 비를 맞지 않았다면, 어떤 햇빛이 오리라는 찬란도 꿈꾸지 못했겠구나. 울음과 웃음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닌 같은 의미이고, 어둠이나 빛이 서로 다른 게 아닌 모두 같은 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그때 메모를 보면서 당시의 정황과 심정을 떠올리며 한 편의 시를 써내려갔다.

 

“비 오다 그칠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을 본 것 같고/ 빗소리는 자기 비평을 쓰는 것 같다// 보는 것의 최고는 자신을 없애고 보는 것// 이런 찬란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간단할까// 때때로 비는 오고 세상은 젖겠지만/ 젖은 세계를 몇 번이나 더 눈에 담을 수 있을까// 보는 법을 배우다 다시 본다/ 보고 또 보아도/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세상은 짓궂은 것이다”(「비를 보는 죄」 부문)

 

“삶의 고독을 눈부신 서정의 언어로 승화”하며 시의 거리를 오래 지켜온 천양희 시인이 어느 산에서 비가 그친 뒤에 만난 찬란의 순간을 노래한 시편 「비를 보는 죄」을 비롯해 61편의 시를 묶은 신작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열 번째 신작 시집.

 

시집에는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슬픔을 깊은 사유와 아름다운 언어로 조탁한,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발자취」)하는 시편이 가득하다. 시인은 “‘가진 것이 시밖에 없을 때 웃는다’”(「딱 한줄」)는 대답을 고민하고, “침묵이 가장 비명”이라거나 “삶이란 학교에서 영원한 학생”(「빈자리가 필요하다」)이라고 생각하거나, “깨어진 뒤에야 완성되는 그 거룩”(「생의 한가운데」)을 한 줄로 적고, “저녁을 외투처럼 걸치고”(「지극히 지루한」) 걸어가며, “바람은 철도 없이 제멋대로인”(「치유의 시작」) 세상에서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가끔은」). 그리하여 “자연을 쓰는 서기”(「내가 떠나는 이유」)로서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시인」)으로 우뚝하게 서 있다.

 

시인 천양희가 맞닥뜨린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슬픔은 무엇일까. 불가피한 존재의 고독과 슬픔을 그는 어떻게 사유하고 노래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천 시인을 지난달 1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식당에서 만났다.

 

―시 「비를 보는 죄」에서 ‘세상은 짓궂은 것이다’는 마지막 문장은 아프고 시리다.

 

“상처는 곧 꽃이고 상처를 거치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이라는 말처럼, 고통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고통 없이는 시도, 자기를 절단 내지 않고는 절창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과 인간들이 저에게 짓궂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십여 년 전 무릎 수술을 한 뒤로 높은 산에 가지 못하고 있다. 저는 산을 탔다거나 올랐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자연을, 산을 어떻게 타고 오를 수 있느냐. 좋은 산에 갈 때는 든다고 표현한다. 산이 거기 있어서 산에 간 것이다.”

 

“병이 나를 들이받은 것과 한 인간을 만난 것” 같은 인생에서 만난 “대형사고”를 반추하거나(「모를 것이다」), 늘 삶을 뒤척이면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모습(「뒤척이다」)도 엿볼 수 있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볼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뒤척이다」 전문)

 

―이 시는 어떻게 나왔는지.

 

“10여 년 전쯤 몸이 안 좋아 수술을 받았다. 무척 아팠다. 아프면 시를 못 쓰는데 어떡하나 싶어서 병상에서 뒤척였다. 시를 안 쓰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속으로 낫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보니 아침이었다. 그때 병상에서 심정을 메모해 뒀다가 나중에 추슬러 쓴 것이다. 저는 평생을 쉬운 길로 갈 수 없었다.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편안하게 잘 수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운 일도 많았고, 삶 자체가 뒤척이는 삶이었다. 많은 난관을 거치고 뒤척이면서 여기까지 왔기에 이런 시를 얻은 것이다. (마지막 문장 ‘천천히 서두른다’는 서로 반어적 단어로 이뤄졌는데) 내년이면 등단 60년인데, 시집은 이번에 열권 째이다. 천천히 써도 나름 다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의 삶도 늦깎이 같다. 천천히 살아온 것 같으면서도 서둘렀다.”

 

아울러 “일상의 반복이 동어반복처럼 권태로울 때 사는 것에 자주 목이 마를 때” 자연을 찾아 떠나는 시인을, 그 자연 속에서 시를 만나고 자유를 노래하는 그를, 시편 「내가 떠나는 이유」에서 만날 수 있다. “자연으로 놀러 가서/ 물 한잔 얻어 마시고 돌아오면/ 온갖 지루함에 생기가 돈다//⋯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다// 바람 아래에서 구경꾼이 되고/ 길 위에서 나그네가 된다// 그때의 자유란/ 또 다른 몰입이며 새로운 긴장이다/ 그때의 나는/ 자연을 쓰는 서기이다”(「내가 떠나는 이유」 부문)

 

―시를 만나러 가는 순간 아닌가.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하고, 치유의 시작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상처가 치유되면서 시가 저를 좀더 희망차게 데려가는 것 같다. 물론, 완전 치유가 됐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아직 바닥 어딘가에는 뭔가 남아있을 것이다. 작년부터 조금씩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올해는 그동안 고생한 저에게 배려를 해야겠다고 해 유럽에 다녀왔다. 많이 치유가 된 것 같다. 시는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다. 병을 앓고 난 뒤에야 다른 사람의 병도 이해하게 된다. 고통의 축제라는 말이 있듯, 병이나 고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병이나 고통 뒤에는 좋은 산문 같은 날이 온다. 어떤 진창을 거치면 좋은 산문 같은 날이 와서 또 절창도 하게 된다.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도 먹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살아보고자 하는 시인의 열정을 만날 수도 있다. 시편 「나의 절경」에선 황금기와 황혼기 사이에서 아직 절경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을⋯. “구겨진 생의 주름을 수평선처럼/ 쫙 펼칠 때가/ 나의 황금기라면/ 인생이여 고맙다고 말할 때가/ 나의 황혼기라면// 두 시기의 맥박을/ 아무도 몰라서 아직 하나뿐인/ 나의 절경!”(「나의 절경」 전문)

 

―생에의 강렬한 의지가 엿보이는데.

 

“말 그대로다.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 제가 지금 인생의 황혼기인데, 가끔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면 아직 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가끔 화를 내면 쓸개 빠진 년이 화를 왜 내느냐, 라고 친구들이 놀린다.”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소유보다는 자유”를, “모범보다는 모험”을 추구할 수 있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도 있다. 시편 「푸른 봄의 기록」에서 청춘은 “마음 전부로 도전”할 수 있기에, “두 번은 없”기에 오히려 아름답다. “소유보다는 자유가/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모범보다는 모험이 최고봉일 때// 그때가 젊을 때이다// 젊다는 것은/ 가끔 길을 잃거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좋은 것이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며 꿈을 이룬다고/ 누가 말했더라// 몸 전체로 살고/ 마음 전부로 도전하면 된다/ 청춘의 기록에/ 두 번은 없다”(「푸른 봄의 기록」 전문)

 

―청춘의 노래가 눈부시다.

 

“대학 시절,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붓글씨로 편지를 써서 보내주셨다. 한 번은 편지에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월을 허송하지 말아라, 청춘부재래 세월막허송’이라고 써서 보내 주셨다. 그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돈은 잃어버리면 다시 벌 수 있지만 청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돌아보면 젊은 날은 푸른 봄이었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요즘에는 배낭 메고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다. 배낭을 메고 아니면 배를 타고 세계를 한번 돌아다보고 싶다. 이번에 스위스를 가서 기차를 타고 융프라우로 올라갔다. 만년설이 녹고 있더라.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창밖을 보니까 호숫가 집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거기에서 한 1년쯤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에는 그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가족의 모습도 보인다. 시편 「바람은 몇 살이야」에선 그리운 아들의 오래 전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래전 봄날/ 네살짜리 아이와 손잡고 언덕에 올랐을 때/ 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때 아이가 불쑥/ ‘바람은 몇 살이야?’ 물었다// 어쩜 저 어린것이/ 바람에도 나이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신기해서 한참 나이를 바라보다가/ 나는 궁색한 대로/ ‘바람은 나이가 없단다 잘 날이 없으니까’/ 대답했던 것인데/ 아이는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바람은 집이 어디야?’ 다시 물었다/ ‘바람은 집이 없단다 떠돌아다니니까’/ 바람 잘 날 없는 내가/ 그렇게 대답을 했던 것인데/ 길 위에서 아이는 어리둥절하고/ 몇 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멀리 강물이 내려다보았다”(「바람은 몇 살이야」 전문)

 

―아들이 나오는 첫 시편인데.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4년 무렵, 네 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고 서울 신촌과 가까운 어느 언덕에 오를 때의 기억을 노래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선 「오래된 나무」를,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믐달」을 각각 썼는데, 아이에 대해선 쓰지 못했다. 제 상처를 헤집는 것 같아서 쓸 수 없었다. 바람은 몇 살이야, 바람은 집이 어디야. 아이가 그때 두 가지를 물었고, 그것을 메모해 뒀더라. 50년 지나서 처음 썼다.”

 

―10번째 시집인데,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전 시집이 불화의 세계에서 헤맸다면,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4년)부터 조금씩 친화의 세계로 나아갔고, 이번 시집은 독자들 사이에서 꼭 내가 한 말 같다,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같은 반응이 나올 정도로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의 지평을 열지 않았나 생각한다. 넓이에 대해 사유도 조금 넓어진 것 같고.”

 

“작문 대회가 있으니,” 담임 김한숙 교사가 어느 날 교탁 앞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머리를 한 가닥으로 땋은 김 선생은 문학에 상당히 애정을 갖고 있었다. “모두 동시를 써서 제출하도록 해요.”

 

하늘 같이 여기던 선생의 말을 따라서, 초등학교 4학년생 양희는 고민 끝에 세 편의 동시를 썼다. 어릴 때부터 한학과 한시를 했던 아버지로부터 당시를 듣거나 『금오신화』 같은 기록문학을 들어오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온 그였다. 그가 쓴 동시는 「동생」과 「제비」, 「연필」 세 편.

 

“「동생」은 동생이 없으니까 동생을 갖고 싶다는 내용을, 「제비」는 제비가 집으로 연결된 전깃줄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악보 같다는 내용을 각각 담고 있었습니다. 「연필」의 경우 연필로 글씨를 썼는데 만약 연필이 없다면 무엇으로 글을 쓸지 생각한 것을 담고 있었지요.”

 

그는 동시 세 편을 김한숙 선생에게 제출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작품이 대회 우수작으로 뽑혔다. 김 선생은 그를 앞으로 불러 세우더니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양희야, 너는 앞으로 시인이 될 거야.” 시인이 뭐지? 시인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던 양희는 순간 눈동자가 커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김 선생이 말을 덧붙였다. “시인이란, 그러니까 시를 쓰는 사람이란다.”

 

시인! 이라는 말이 그의 가슴으로 덜컹, 하고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하늘같은 선생이 말씀하는 사람이니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만 생각한 그였다. 중학교에 가서야 시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알게 됐다. 시인 천양희의 원점이었다.

 

“당시에는 시인이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김한숙 선생님의 그 말씀이 제 인생의 길잡이가 돼 준 거죠.”

 

소녀 양희는 풍경이 아름다운 시골에서 자랐다. 넓은 집 뒤에는 들이 있었고, 뜰 곳곳에 감나무나 유실수, 치자나무 등이 있었으며, 집 앞에는 개울이 있었다. 그는 오빠들과 물장구도 치고, 저녁에는 모닥불을 피우곤 했다.

 

여섯 살 어느 여름 밤, 그는 작고한 작은 오빠와 함께 시골집의 평상에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밤하늘에서 별이 우수수 쏟아지는 게 아닌가. 이때 그가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빠, 나 죽으면 별이 될란다.”

 

그보다 두 살 많던 작은 오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린 것이 어떻게 죽으면 별이 될 것이라고 하는지.’ 소름이 쫙 끼쳐왔다. 오빠는 겉으론 그를 야단 쳤지만, 여동생이 혹시 불행하게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시험을 치러서 경남여중에 입학한 그는 이후 여중과 여고를 마칠 때까지 6년 동안 사상에서 부산 시내까지 기차 통학을 하며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영랑 시집, 김소월 시집, 유치환 시집⋯. 책이 어떻게 그렇게 좋은지. 고등학교 때엔 진짜로 문학을 하려고 했다.

 

기차를 처음 탔을 때는 놀라기도 했다. 기차 밖 풍경이 매 시각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차는 앞으로 가는데, 풍경은 왜 자꾸 뒤로 갈까. 기차가 10m 달릴 때 풍경이 다르고 50m을 달릴 때 또 달랐다. 풍경이 달라지면서 마음도 달라지는 걸 느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왜 왔느냐.” 시인 박두진은 움직이지 않고 마치 바위처럼 앉아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시 「명태」를 쓴 시인 양명문 이화여대 교수를 통해 박두진을 소개받은 뒤였다. 가끔 기숙사에서 몰래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태릉 배 밭으로 가서 배꽃을 구경도 했던 그였다.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청상과부 같은 하얀 배꽃들.

 

“시를 쓰고 싶습니다. 선생님, 시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시를 추천 받아서 시인이 되고 싶었던 이화여대 국문과 1학년생 천양희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두진은 시를 세 편 준비해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시 세 편을 써서 다시 박두진의 연대 연구실을 찾았다. 그의 시를 다 읽은 뒤 박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를 써서 한 달에 한 번씩 오도록 해라.”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시를 3편에서 5편 정도를 써서 연대 근처에 살고 있던 박두진의 집을 찾아갔다. 박두진은 그의 시에 빨간 줄을 그어서 표시만 해놓을 뿐 어떻게 고치라는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민하고 공부해 고쳐보라는 취지였다. 1년간 시인 박두진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끝에, 대학 3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었다. 너는 앞으로 시인이 될 거야, 라고 김한숙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뒤 15년 만이었다.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난 천양희는 대학 3학년 재학 중이던 1965년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시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마음의 수수밭』,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등을 발표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공초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1974년 인생의 ‘대형사고’를 겪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주 아파서 드러누웠다. 살면서도 죽을 생각만 했다. 5년 뒤, 부안 직소폭포에 가서 폭포수처럼 실컷 울고 폭포소리를 가슴에 넣고 돌아온 뒤부터 다시 살 수 있었다. 울음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울음 바로 뒤에 웃음이 온다는 것을, 어둠 뒤에 빛이 온다는 것을, 울음과 웃음도 같은 음이라는 것을, 어둠과 빛도 같은 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준다면.

 

“젊은 시절에는 높이를 좋아하고 열망해 산에 많이 갔다. 인생을 좀 알게 된 중년에는 물을 좋아해 물에 대한 시가 많았다. 노년에는 넓이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 들처럼 넓이가 있거나 바다나 하늘처럼 경계 없는 것들이 좋았다. 성찰도 깊어지고.”

 

―시 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지.

 

“무엇보다 정신,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치 공기처럼, 시인이 정신을 놓치면 죽고, 정신이 빠지면 시라고 할 수 없다. 긴장하지 않고 탄력 없는 시를 쓰면 산문보다 못할 수도 있다. 저는 언제나 시 정신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야 시가 긴장을 잃지 않는다. 지금까지 제 화두는 마음이었다. 사람 속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을 잘 가져야 한다. 젊을 때는 마음을 잡을 수 없어서 많이 헤맸다. 옛날에 배낭을 메고 전라도로, 강원도로 많이 헤매고 다녔다. 시에 마음 심자가 들어가야 시심이 된다.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시를 썼으면 좋겠다. 한편은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을 위해서, 또 다른 한편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마지막 한편은 우리가 외면한 사람을 위해서 시가 바치어 줬으면 좋겠다.”

 

―시작에서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40대 때 책을 읽다가 이하(李賀, 791―817년)라는 당나라 천재 시인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 이하는 가난해 당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당나귀 옆구리에 늘 비단 주머니를 걸어두었다. 길을 가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메모를 해 주머니에 넣어두었고, 또 가다가 떠오르면 주머니에 메모를 넣어두곤 했다. 집에 돌아온 뒤 메모를 꺼내보면서 수정 보완해 시를 썼다고 하더라. 메모를 바탕으로 시를 쓰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거의 40년이 다 돼간다. 메모가 시를 쓰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느 순간 생각이 떠오를지 몰라서 수시로 메모를 한다. 메모 노트가 몇 십 권이 된다. 젊을 때에는 어떤 것을 머리로 가슴으로 넣어두면 되살아나지만, 나이를 먹으면 자꾸 잊어먹더라. 순간순간 정황이나 심정을 메모해두고, 시를 쓰면서 다시 정황과 심정을 상상한다. 메모는 상상하게 만들고, 상상은 재능을 불러낸다. 다만 저는 메모해 놓으면 금방 쓰진 못하고 한참 세월이 흘러야 쓸 수 있다.”

 

시인 천양희의 하루 일과는 산책으로 시작한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삼십 분 뒤 집을 나서서 두 시간 정도 집 부근의 공원을 산책하고 운동한다. 물론 산책하다가도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메모한다. 산책은 생각의 산파.

 

아침은 선식처럼 간단하게 한다. 배부르면 아무것도 안되기 때문. 낮에는 대체로 책을 읽거나 메모를 정리한다. 변별력 없는 작품을 싣는 잡지에는 화가 나지만, 가끔씩 좋은 시를 만날 때는 기쁘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 보듯. 점심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오수를 취한 뒤, 우두커니로 있기도 하고, 잡생각을 하기도 하며, 고개를 팍 숙이고 있는 베란다의 화초와 이야기를 하기도.

 

⋯네가 지금 겸손하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기운이 떨어진 것이냐. 물을 주지 않아서 네가 지금 화가 나기도 하겠지만 왜 그렇게 참지 못하는 것이냐.

 

보통 새벽 1시나 2시에 잔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 산문은 주로 낮에 쓰고, 시는 조용한 밤에 쓴다. 시를 쓸 때는 집중적으로 쓴다. 손을 깨끗하게 씻는다. 이어서 낮은 상에 앉아서 하심을 갖고 쓴다. 백지 위에 부드럽게 잘 나가는 두꺼운 볼펜으로⋯.

 

펜 끝에서 마음 끝까지, 머리에서 마음으로. 시라는 것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 시인이라는 것은 적막이라는 무서운 짐승을 기다리는 고독한 사냥꾼. 더구나 다 잃어버리고 마지막 시 하나 남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시인의 정신은 더욱 돌올해진다.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 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도 질 때는/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시인」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