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9시30분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탄핵 찬성 집회 현장 곳곳에서 “결국”, “이를 어째”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몇몇 시민은 눈물을 보였다. 집회 장소를 채우던 댄스곡은 어느새 슬픈 곡조의 발라드로 바뀌었다. 대다수 시민은 빠르게 현장을 떠났지만, 국회 정문 앞에 모인 채 “윤석열 탄핵”을 외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시민도 많았다.
이날 오후 6시20분쯤 시작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은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만 참여해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안철수·김예지·김상욱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힘 의원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여당 의원들의 보이콧으로 윤 대통령 탄핵이 불발된 것에 분노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박모(40)씨는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며 “국회를 무력화하려던 대통령을 지키는 게 여당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직장인 김희원(33)씨는 “국민의힘이 명백한 내란 사태를 외면하고, 국민이 부여한 투표권을 가벼이 여기는 모습에 깊은 실망을 느낀다”고 밝혔다. 직장인 임현정(32)씨는 “윤석열 리스크가 미칠 경제적 악영향은 안중에도 없고 정당 잇속만 차리는 게 당론이라니 우리 정치의 수준이 창피하다”고 말했다.
집회에는 이날 오후 7시 기준 경찰 비공식 추산 10만2000명(최대 15만9000명),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주최 측 추산 100만명이 집결했다.
서울 기온이 영하 2도까지 떨어지는 등 추운 날씨 속에서도 시민들은 목도리와 모자로 무장한 채 국회의사당 앞부터 여의도공원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인파가 몰리면서 한때 서울지하철 여의도역과 국회의사당역은 열차가 무정차 통과했다. 인근에 있는 9호선 노량진역에서는 국회의사당으로 가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개찰구 밖까지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는 남녀노소 시민 참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몇 주간 숭례문 앞에서 이어졌던 민주당 장외집회 및 야권 시민단체들이 연 정권 퇴진 집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8세 아들, 남편과 함께 온 서울 마포구 주민 박정아(38)씨는 “평소 정치와 거리를 뒀지만, 정치 때문에 일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느껴서 왔다”고 말했다.
특히 현장에선 10·20대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정당 로고를 패러디한 깃발과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나섰다. 비상계엄 사태를 보고 ‘5·18 민주화운동 직전인 1979년 계엄 사태를 떠올렸다’며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들고 온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집회 참가자가 인근 식당과 카페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미리 선결제했다는 인증 글이 다수 올라왔다.
‘김건희 특검법’ 재표결이 부결된 직후 국민의힘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떠나자, 시민들은 이들 의원이 국회를 떠날 수 없도록 국회의사당 담벼락을 둘러싸기도 했다. 담벼락에 기대 시험공부를 하던 대학생 장은아(25)씨는 “탄핵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집회에 참여했다”며 “다음주 월요일이 시험이라 공부를 많이 못 해서 불안하지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꼭 탄핵안이 가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민들이 다수 모여 탄핵 불발에 울분을 토했지만,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미리 챙겨온 비닐봉투와 집게로 거리의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치운 후 해산했다.
민주당이 11일 탄핵소추안 재발의를 예고한 가운데, 상당수 시민은 “다음 집회에도 참여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직장인 이지선(33)씨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좌절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 의왕에서 온 박민정(42)씨는 “여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떠났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너무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든다. 투표로 부결이 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며 “다시 탄핵안이 발의되면 또 거리로 나오겠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맞불 집회에서 보수 성향 단체들은 국회 표결 무산 소식에 환호했다. 이들은 “윤석열 만세”, “자유국가 만세” 등을 외치는가 하면 표결에 참여한 안철수·김예지·김상욱 의원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6시 기준 세종대로 일대에는 경찰 비공식 추산 1만8000명(최대 2만명)이 모였다. 주최 측은 100만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는 8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가 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하고 정국을 수습하겠다고 한 담화 내용에도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교수·연구자 단체인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는 “끔찍한 친위쿠데타 기도는 윤석열의 ‘우리 당’에 의해 셀프 면죄부를 받았다”며 “향후 벌어질 수 있는 사태의 책임은 윤석열과 반란 공범·종범들, 또 추경호(원내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대통령 권한을 당대표나 특정 정당에 위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며 “윤 대통령의 ‘(정당에 국정을) 일임하겠다’는 선언도 법적 구속력이 없고 언제든지 권한을 회수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어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법조계도 윤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탄핵 표결 당일 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나온 뒤 대한변호사협회는 “위헌적인 비상계엄 선포로써 국헌을 문란케 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냈고, 헌법·행정법 연구자 131명은 시국선언을 통해 “비상계엄은 명백한 위헌·위법”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단체 촛불행동은 이날도 오후 3시부터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오후 5시 기준 경찰 비공식 추산 1만3000여명, 주최 측 추산 10만여명이 모였다. 전날 국회 앞 집회를 이끈 민주노총은 9일부터 “매일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