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냉전이 막바지에 이른 1989년 여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국제문제 전문 잡지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에 ‘역사의 종말’이란 도발적인 제목의 글이 실렸다. 저자는 30대 후반의 소장 정치학자로 미 국무부에서 일하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박사였다. 그는 공산주의 대 자유주의의 대결이 자유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으며, 향후 역사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대체할 다른 제도 혹은 체제는 출현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을 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옛 러시아) 영향권에 있던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가 가속화했으니 서방 진영 곳곳에서 ‘후쿠야마가 옳았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1991년 원조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해체되며 후쿠야마 이론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참혹한 전쟁,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실 등을 감안할 때 후쿠야마의 예언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든다. 러시아의 경우 공산주의 대신 권위주의 독재 국가로 존속하며 여전히 세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사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발표 직후부터 세계 학계에서 격렬한 논란에 휘말렸다. 특히 좌파 학자들은 “서방 지식인들의 오만함을 드러낸 사례”라며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고도 20여년이 흐른 현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을 것’이라던 후쿠야마의 낙관적 전망은 완전히 빗나간 것처럼 보인다. 후쿠야마 본인도 그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 후쿠야마는 정치학자로서 한국의 대통령제에 관심이 큰 듯하다. 2015년 스탠퍼드대 정치학과 교수로서 내한한 그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에 관한 질문에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공공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므로 권한이 강화될 수 있는데, (대통령이 정작 정치와 거리를 두려고 할 경우) 그 권한이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여의도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듯한 박 대통령의 태도를 꼬집은 셈이다. 후쿠야마는 “(미국에서) 대부분의 대통령들은 야당 등 반대파를 설득하는 일을 해야 한다”며 “성공하는 대통령들은 반대파까지도 잘 설득해 상당한 지지를 얻어내고, 그것이 좋은 정치”라고 조언했다. 지극히 타당하고 상식적인 비평이라 하겠다.
12·3 비상계엄 파문으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72세의 고령에도 스탠퍼드대 강단을 지키는 후쿠야마가 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겨냥해 쓴소리를 했다. 그는 윤 대통령을 “검찰에서만 경력을 쌓아 매우 경험이 부족한 정치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어 “대통령제에서는 권력 분립으로 인해 (여소야대 의회에 직면한) 대통령이 종종 좌절감을 느낄 수 있지만, (비상계엄 선포라는) 윤 대통령의 반응은 역사적으로 내가 아는 어떤 누구보다도 극단적”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시민들의 용감한 행동과 국회의 발빠른 대응으로 계엄이 끝내 좌절된 점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보여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한민국 역사는 앞으로도 종말 없이 계속되겠지만, 대통령제는 이번 사태로 종말을 맞은 것이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