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3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6시간 동안, 온 국민은 비상계엄이라는 대통령의 기습 공격으로 크게 당황했고 분노했다. 대통령의 ‘셀프쿠데타’, ‘완전한 자충수’라는 기사에서도 보듯 실패한 계엄이었지만 그 정치적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근현대 시기 일본은 수시로 기습 공격에 나선 역사적 전과가 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1941년 12월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 21척과 비행기 188대가 파괴되고 2400여명이 전사하였다. 탄약고에 폭탄이 명중된 애리조나호에서만 11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즉각 대응을 선언했고, 이로써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진주만 기습 공격과 미국의 참전은 일본에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야말로 자충수를 둔 셈이 되었다. 미국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8월15일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진주만 공습은 근대 시기 일본이 선제공격으로 결과를 얻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에서 도취한 바가 크다. 1894년 7월 조선에서 일어난 청일전쟁 역시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6월8일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고, 다음날 일본군은 제물포에 상륙한 후 6월23일에는 한양에 입성해 용산에 지휘 본부를 두었다. 7월23일 경복궁을 점령한 데 이어, 25일에는 아산만 풍도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해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다. 이후 평양, 압록강, 만주 등지에서도 청·일 간의 전쟁은 이어졌고, 일본은 승전을 거듭하며 타이완까지 점령하였다. 결국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양국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배상금 2억냥을 일본에 지급하고, 요동반도와 타이완 등을 일본에 할양하는 굴욕을 당하였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