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년 인천의 변천사 소리없이 지켜본 도심의 목격자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49) ‘인천 원도심의 상징’ 답동성당

시가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치
두 번째 본당 이례적 같은 자리
로마네스크·비잔틴 양식의 조합

‘관광자원’ 위해 역사문화공원으로
가톨릭회관 허문 뒤 접근성 개선
테마파크 같은 LED 조명 아쉬워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도 결혼식은 성당에서 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가 사라지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와 함께 가볼 수 있고 고민이 생기면 찾아가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뱃속에서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아내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내 제안을 듣자 반가워했다. 하지만 개신교를 믿는 부모님에게는 달가운 제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결혼식 장소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성당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이었다. 성당이 있는 신포동 일대는 고등학교 시절 천천히 쇠락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정할 때 가장 먼저 고려했던 동네다. 그곳을 걷다가 또는 동네 명물인 신포 통닭을 먹고 나오면 어김없이 오래된 답동성당의 종탑이 보였다.

 

가톨릭회관에 가려져 있던 답동성당은 성당 정면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제 원도심의 이미지를 이끄는 존재가 되었다.

원래 답동성당은 지금의 자리가 아닌 인천 옛 항구와 각국 조계지가 설정돼 있었던 북성동에 지어질 계획이었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에 소속돼 있던 신부들의 선교권이 보장됐다. 2년 뒤 유진 코스트 신부는 제물포 본당을 짓기 위해 당시 인천 해관 직원이었던 라포트(E. Laporte, 세계일보 2023년 10월13일자 20면 ‘20화, 호남관세박물관’편 참고)에게 부지 매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입지여건이 좋지 않고 추후 확장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1890년에 현재 성당이 지어진 땅을 매입했다. 새로 산 부지는 주변보다 높은 언덕인데 그래서 어느 곳에서 봐도 눈에 띄며 동시에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제물포 본당에 가장 처음 부임한 신부는 니콜라 빌렘이었다. 나중에 그는 안중근 의사에게 ‘토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해주었고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는 고해성사도 받아 주었다. 빌렘 신부는 사제관의 반을 막아 임시 예배소로 썼다. 하지만 신도 수가 200명이 넘어가자 제2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에밀 르 비엘 신부가 독립된 본당 건립을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답동성당의 첫 번째 본당은 1894년에 착공돼 3년 후에 완공됐다. 설계는 유진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당시 그가 설계했던 서울의 중림동 약현성당이나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한 장밖에 없는 첫 번째 본당 사진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약현성당 가운데에 있는 첨탑 부분을 많이 닮았다. 아마도 내부는 양쪽 통로(側廊)가 거의 없고 가운데 통로(柱廊)만 있는 구조였을 것 같다. 건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정면은 신포동과 중앙동, 선린동이 있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가운데 본랑과 양쪽 측랑으로 구성된 성당의 내부 모습

첫 번째 본당이 완공되고 40년 후 신도 수는 1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400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본당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결국 당시 본당 신부였던 유진 드뇌 신부가 두 번째 본당 건립을 결정했다. 두 번째 본당은 1934년에 착공돼 3년 후에 완공됐다. 그런데 두 번째 본당을 건립하는 방식이 특이했다. 일반적으로 본당을 새로 지을 때 기존 본당이 있는 자리가 아닌 그 인근에 짓는다. 새로운 본당을 짓는 동안 기존 본당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동성당의 두 번째 본당은 첫 번째 본당 외곽에 벽돌을 쌓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짐작해 보면 첫 번째 본당이 놓인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만약 같은 자리에 두 번째 본당을 짓기 위해 첫 번째 본당을 허물었다면 공사기간 미사를 드릴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게 된다. 어렵기는 했지만 첫 번째 본당이 지어진 자리에 두 번째 본당이 들어서면서 답동성당은 처음 지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주목받는 위치에서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본당은 첫 번째 본당과 달리 로마네스크 양식이 전체적으로 쓰이고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조합으로 지어졌다. 설계를 맡은 피에르 시잘레 신부는 기존에 자신이 설계했던 원주의 용소막성당이나 음성의 감곡성당과는 다른 건축양식을 택했다. 하지만 양파를 닮은 첨탑 위 돔(dome)이나 지붕선을 따라 레이스(lace)처럼 장식된 요소를 제외하면 용소막성당이나 감곡성당과 유사한 부분도 많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답동성당은 빅터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23년 앞서 지어진 전주의 전동성당과 비슷하다.

1979년에 제작·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

성당 준공 이후 신자석이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닥이 마루에서 인조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외관상의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1973년 성당 서쪽에 5층 높이의 가톨릭회관이 들어서면서 답동성당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이후 6층 증축). 일단 성당 앞을 지나는 우현로에서 성당으로 이르는 접근로가 직선으로 진입하는 경로에서 가톨릭회관을 오른쪽에 끼고 우회하는 경로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그전까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성당이 가톨릭회관에 가려 첨탑 끝과 그 위에 돔만 보이게 됐다. 그나마도 각도를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었고 우현로를 따라 걸을 때는 성당을 볼 수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속담은 도시에서도 유효하다. 그렇게 인천 원도심에서 답동성당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갔다.

이런 상황은 작년 6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이 준공되면서 바뀌었다. 사업을 통해 가톨릭회관이 헐리고 그 자리에 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됐다. 공원 하부에는 지하주차장과 신포지하상가로 연결되는 통로도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예전처럼 답동성당이 더 잘 보이게 됨으로써 인천 원도심에서 존재감이 커졌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도 과거 우현로에서 바로 진입하는 접근로와 함께 경사를 따라 지그재그로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접근로가 새로 생겼다.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역사적인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LED 야간조명은 오랜 역사를 지닌 답동성당을 테마파크의 배경처럼 보이게 만든다. 아마도 사업명에 쓰인 ‘관광자원’이라는 표현이 이런 방식으로 구현된 것 같다. 화려하고 밝고 경쾌한 것만이 관광자원이 되는 건 아니다. 역사적인 건축물, 그중에서도 종교시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깊었어야 했다.

결혼 후 어린 딸을 데리고 답동성당에서 미사를 본 적이 있다. 딸에게 이곳에서 아빠와 엄마가 결혼식을 했다고 이야기하자 그때 자기는 어디에 있었냐고 물었다. 몇 년 후에는 그해 마지막 날 미사를 이곳에서 봤다. 언젠가는 회사를 옮겨야 하나라는 고민을 할 때 아무도 없는 성당에 우두커니 앉아 제단 위 십자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이제 내게 답동성당은 어떤 특정한 날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가고 싶은 곳이 됐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