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5월11일, 일본 요코하마 호도가야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일본골프 메이저대회 제14회 일본오픈에서 노부하라 도쿠하루(延原德春)가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25세의 노부하라는 4라운드 합계 2오버파 290타를 치며 나카무라 도라키치를 3타 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섰다. 노부하라 우승 소식에 한반도는 들끓었다. 노부하라는 1916년 2월 경기도 고양(현 서울 성동구 뚝섬)에서 태어난 한국인 ‘연덕춘’이었기 때문이다. 농부의 아들로 자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운동했던 ‘한국인’ 연덕춘이, 1921년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조선의 첫 골프장이 생겨나며 골프가 이제 겨우 이 땅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골프가 뭔지 모를 만큼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진 골프로 그것도 일본 메이저대회를 제패했다는 소식은 민족정체성을 고취하기 충분한 뉴스였다. 하지만 기록 속 연덕춘은 없다. 일본골프협회(JGA)가 이 대회 우승자를 ‘일본인 노부하라’라고 적어 뒀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지 79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던 기록이 고쳐질 전망이다. 한국 골프계가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일본과 협의해 연덕춘 우승 기록 수정 절차를 밟고 있어서다. 이르면 다음달 노부하라 도쿠하루는 한글인 ‘연덕춘’으로,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정될 전망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국적을 여전히 일본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체육계 고위 관계자는 10일 “대한골프협회(KGA)와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등 한국 골프계가 JGA와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등 측과 연덕춘 국적과 이름 수정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며 “일본 측에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 무난하게 수정 협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골프의 아버지,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 KPGA 공동 창립자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가진 연덕춘은 한국 골프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32년 군자리 골프코스(현 서울 성동구 능동 어린이공원 부지)에서 캐디 보조로 일하며 골프와 인연을 맺은 연덕춘은 그해 한국인 최초로 일본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다. 1935년 일본 관동골프연맹 자격증을 획득하며 한국 최초 프로골퍼가 된 연덕춘은 1935년 일본 도쿄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일본오픈을 통해 첫 프로 무대에 섰다. 연덕춘은 이 대회에서 컷 탈락하는 등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 못하다 결국 일본오픈을 제패하는 기염을 토했다. 연덕춘은 당시 우승 트로피를 들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뒤이어 6·25전쟁이 터졌고, 이 탓에 전성기 연덕춘은 골프를 칠 곳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전쟁 여파에 연덕춘이 일본에서 가져온 우승 트로피도 사라졌다.
체육계 고위 관계자는 “1941년 대회 우승 트로피를 제작했던 업체를 찾아 당시 받았던 우승컵과 똑같은 트로피를 제작할 계획”이라며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잡아가는 과정에 있지만 한국을 떠나 외국에 있는 연덕춘 가족과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1958년 6월 서울CC에서 열린 제1회 한국프로골프 선수권대회에서 정상을 밟은 연덕춘은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립에 힘을 보태 KPGA 1호 회원으로 등록됐고, 1972년에는 제2대 협회장으로 활동한 뒤 2004년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KPGA는 연덕춘을 기리기 위해 한 시즌 최저 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덕춘상’을 수여한다.
한편 IOC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에 대해 ‘대한민국의 영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름을 ‘Kitei Son’으로,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16년 손기정 국적 및 한글 이름 표기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IOC는 “식민지배를 받은 여러 국가 선수 국적을 모두 변경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라며 “올림픽 개최 당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유로 IOC는 손기정을 포함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한국 선수 11명을 일본식 이름과 일본 국적으로 남겨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