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서울의 밤과 베를린의 밤 사이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그 밤에 대한민국 국민은 집단적 대혼란에 빠졌다. 나도 그랬다. 생중계되는 계엄군과 국회, 시민들의 대치를 보면서 분노와 충격의 게이지는 수직 상승했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 미쳐서는 패닉에 빠져 오열했다. 다행히 계엄의 시간은 짧았고 우리의 삶은 기적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이 밤을 보내면서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는 올리버 히르슈비겔의 ‘다운폴’(2004)을 먼저 떠올렸다.

 

‘다운폴’은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56번째 생일부터 4월 30일의 자살, 그리고 이후 독일이 항복을 공식화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다룬다. 나치의 바이블인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공식화된 세계 정복과 인종 청소라는 목표에 실패하고 독일의 몰락을 눈앞에 둔 시기, 포위된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는 심신이 병든 독재자가 국민과 군사들에게 동반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에 없는 사령관들과 군대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리는 그는 이미 몸과 정신이 깊이 병들어 있는 환자이다. 영화는 폭격이 쏟아지는 도시와 지하 벙커를 오가며 최후를 맞이하는 벌거벗은 임금님과 주변 인물들의 행위를 제시한다. 패색이 짙어진 거친 조명 속 지하 벙커에는 히틀러의 순장조와 탈출파들이 뒤섞여 있다. 패하느니 죽겠다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재자는 독일 국민은 스스로 약함을 증명했고 약자가 죽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 실패한 독일 국민을 자신의 죽음과 함께 벌하려 한다. 영화는 독재자의 광기와 야망, 최면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내려진 비극을 보여준다. 이 비극의 지침서가 바로 1925년 히틀러가 집필한 ‘나의 투쟁’이다.

12·3 비상계엄 해제 후 국회에서 열린 조사에서, 구속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최애서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나의 투쟁’은 그 사악한 영향력으로 인해 독일에서 수십년간 출판 금지된 책이다. 영화 엔딩부에서 괴벨스와 그의 아내는 ‘총통/국가사회주의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동반자살을 하는데 때로 신념이 종교 못지않은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선택이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김용현이 히틀러의 순장조를 자처한 괴벨스를 꿈꿨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국가사회주의’ 없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괴벨스 문장 속에 그는 어떤 대체 문구를 넣을 수 있었을까? 그 밤의 일이 희극 같은 비극인 이유는 도무지 괄호 안에 채워질 적합한 문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술과 망상이라는 알리바이 외에는 자신을 존재 증명할 수 없는 친위 쿠데타. 벙커 안에서 막을 내린 히틀러의 시대처럼 2024년 겨울에 벌어진 이 상황에도 분명히 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사건을 증언할 많은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맹수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