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시대―로맨스 판타지에는 없는 유럽의 실제 역사/ 임승휘/ 대원씨아이/ 1만9800원
“윌리엄 호가스(1697∼1764)는 영국의 화가이자 사회비평적 풍자화가이다. 1743년부터 1745년 사이에 그는 ‘요즘의 결혼(Mariage a la mode)’이라는 연작 여섯 편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현재 런던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귀족의 도덕적인 삶이라는 신화를 까발리고 중매결혼과 그 이후 결혼생활을 징그러울 정도로 잔인하게 풍자했다. 정교하게 기획된 이 연작은 ‘혼인 합의’, ‘나란히 앉은 부부’, ‘검진’, ‘아침 단장’, ‘백작의 죽음’, ‘백작부인의 죽음’의 순서로 한 망나니 귀족의 정략결혼, 바람과 도박으로 얼룩진 엉망진창인 결혼생활, 치정에 따른 남편의 죽음과 뒤이은 부인의 비참한 자살에 이르기까지 돈과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정략결혼의 막장극을 보여준다.”(159쪽)
‘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가문이나 신분 따위가 좋아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가진 계층 또는 그런 사람.’ 귀족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이 같은 사전적 정의로는 귀족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역사에 그들이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탄생시킨 사회문화와 생활양식은 어떠했는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 온 귀족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진실을 낱낱이 풀어낸다.
‘귀족’에 관한 키워드가 몇 가지 있다. 블루 블러드(푸른 피), 기사도, 목숨을 건 결투, 가문을 상징하는 다양한 문장, 노블레스 오블리주, 요새화된 으리으리한 성…. 이 키워드들은 마치 귀족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특히 ‘귀족은 푸른 피를 타고난다’는 신화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대중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저자는 이 ‘푸른 피’ 신화가 이방인과 피가 섞이지 않은 귀족 가문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표식으로 기능한다고 설명한다. 귀족의 ‘푸른 피’와 창백한 피부는 사회적 신분을 구별하는 장치로도 활용되었는데, 전통 사회에서 검게 그을린 피부는 대체로 농사나 밭일 같은 야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따라서 창백한 피부는 땡볕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피부가 그을릴 수밖에 없던 농민과 구별되는 귀족의 사회적 표식으로 인식되었다.
‘결투’ 또한 ‘귀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수많은 영화와 연극, 오페라 등으로 재탄생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유명한 결투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촌인 ‘티볼트’ 간의 결투가 그것이다. 로미오와 티볼트의 가문은 서로 앙숙 사이로, 이들의 결투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문으로서도 명예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다. 그런데 귀족들은 왜 ‘결투’라는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했을까. 저자는 결투가 중세 때 재판방식 중 하나였다고 들려준다. 분쟁이 일어나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옳다는 식의 논리를 따라 결투를 벌인 것이다. 결투는 이후 귀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명맥이 이어졌다.
결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싸움에서 이긴 자는 무죄이고 진 자는 유죄가 된다는 점이었다. 9세기 프랑스는 결투 남용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실시했지만 실효성이 크지 않았고, 17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이르러 국가의 사법과 행정기구가 강화되고 나서야 상황이 달라졌다. 하지만 결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국왕에게 결투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반면 귀족에게는 잃어가는 자신들의 권리, 즉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권리와 힘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었다.
귀족은 일반 대중과 구별되는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대상이었다. 저자는 귀족 또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를 꾀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고 주장한다. 특권층으로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겉핥기식으로 다루어 왔던 ‘귀족’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했다. ‘챕터 1’에서는 혈통의 신화부터 결투, 기사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거쳐 에티켓과 귀족 가문의 문장에 이르기까지, 독자가 한 번쯤 접해보았을 비교적 익숙한 개념으로 귀족 세계를 설명한다. ‘챕터 2’에서는 귀족의 가족, 결혼, 자녀 교육, 의식주 같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챕터 3’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귀족 중 주목할 만한 인물을 선별, 그들과 얽힌 사건을 통해 귀족의 삶을 반추한다. 마지막 ‘챕터 4’에서는 귀족에 대한 역사학적인 개념 정의, 귀족이 되는 방법과 작위의 구조, 귀족이 하는 일과 귀족들 사이의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정리했다.
저자 임승휘는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4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근대사 연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시각의 역사 바라보기를 시도하고 있다. 선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도 겸하고 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EBS ‘인물사담회’ 등에 출연하면서 역사를 매개로 대중과 호흡하며 인문학적 지식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