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글라스에 따라 달라지는 와인 맛… 기분 탓? 과학적?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와인 글라스 클수록 맛과 향  더 잘 느껴져/샴페인도 큰 글라스에 마셔야 제대로 즐길 수 있어/특정 캐릭터 강조하도록 설계한 신개념 독일 글라스 지허 탄생

지허 글라스. 인스타그램

어떤 크기의 글라스를 사용할까. 와인을 마실 때 이런 고민 한번쯤 해봤을 겁니다. 품종도 다양하고 같은 품종이라도 스타일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죠. 과연 어떤 글라스가 내가 마시는 와인을 가장 맛있게 표현할지 늘 알쏭달쏭합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글라스는 보통 길쭉한 플루트 모양의 샴페인 글라스를 시작으로 화이트, 보르도, 부르고뉴 순으로 보울 사이즈가 큽니다. 그렇다면 샴페인은 반드시 샴페인 글라스에, 보르도 와인은 보르도 글라스에 마셔야하는 걸까요.

 

다양한 글라스.  최현태 기자

◆기분 탓? 아니면 과학적?

 

와인 글라스의 모양과 크기에 따른 맛과 향의 차이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먼저 뭉툭한 물잔에 따라 마시나 와인 글라스에 따라 마시나 맛과 향은 똑같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질의 특징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와인을 담는 용기가 달라져도 맛과 향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같은 와인을 물잔과 와인 글라스에 따라서 마실 때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건 기분 탓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미 시각을 통해 뇌에 전달된 정보때문에 와인 글라스에 따른 와인이 더 맛있게 느껴지도록 작동한다는 얘기입니다.

 

지허 글라스. 인스타그램

하지만 글라스의 크기나 모양에 따라 맛과 향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매우 과학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혀의 미각세포는 부위마다 특정한 맛을 느끼는 정도가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에 와인이 혀의 어느 부위에 먼저 닿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게 감지될 수 있다는 군요. 또 같은 와인이라도 잔에 따라 산도, 탄닌, 알코올의 균형과 아로마의 집중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글라스에 따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전달하게 된답니다. 특히 두께가 얇을수록 혀의 특정 부위에 정확하게 와인이 전달되지만 림이 두껍고 뭉툭한 잔에 마시면 혀 전체에 와인을 퍼뜨리면서 유독 쓴맛과 알코올이 강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지허 글라스. 인스타그램

기자는 후자의 주장에 한표를 던집니다. 글라스 모양과 크기에 관계없이 과학적으로는 맛과 향이 같다고 할지라도 시각적으로 뇌가 더 맛있게 느끼도록 작동한다면 글라스의 모양과 크기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카베르네 소비뇽처럼 남성적인 캐릭터를 지닌 품종은 볼이 넓으면서도 긴 글라스를 사용해야 파워풀하면서도 농밀한 맛과 향을 오래 잘 잡아 둡니다. 꽃향이 도드라지는 섬세한 피노누아는 볼이 가장 넓은 잔에 마셔야 산소와 빠르게 접촉하면서 다양한 향이 풍성하게 피어납니다.

 

샴페인과 글라스. 최현태 기자

◆샴페인은 폭 좁고 길쭉한 플루트 잔에 마셔야 한다?

 

그렇다면 샴페인은 플루트 모양 글라스에, 화이트 와인은 보르도 보다 훨씬 볼 사이즈가 작은 잔에 마셔야할 까요. 이는 잘못된 상식입니다. 플루트 잔에 샴페인을 따라 마시면 버블은 아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샴페인의 맛과 향은 30%도 채 느끼지 못합니다. 폭이 좁으니 향이 산소와 접촉하며 피어날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와인의 아로마는 와인 잔 보울 안쪽의 벽을 타고 흐르면서 발산되는데 플루트 잔은 이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샴페인과 글라스.

더구나 샴페인은 버블보다 맛과 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보울이 큰 잔일수록 좋습니다. 샴페인은 병에서 2차 발효를 거치고 효모 앙금과 함께 최소 12개월 이상 숙성을 거치면서 브리오슈 같은 빵냄새와 잘 익은 사과향이 풍성하게 만들어 집니다. 따라서 부르고뉴 잔처럼 보울이 큰 글라스를 사용해야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더 오래 숙성하는 빈티지 샴페일수록 볼이 큰 잔을 선택해야 합니다. 와인바나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주문했는데 플루트 잔을 갖다 준다면 주저하지 말고 부르고뉴 잔으로 교체해달라고 요청하세요. 명확한 차이를 알게 될 겁니다. 화이트 와인도 마찬가지랍니다.

 

지허 글라스. 인스타그램

그렇다면 파티에서는 샴페인을 왜 플루트 잔에 따라 서브할까요. 세 가지 이유입니다. 적은 양을 따라도 많이 따른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큽니다. 또 직원이 한꺼번에 여러 잔을 서브하기 편합니다. 또 멀리서 봐도 샴페인을 마시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든 샴페인 업계 마케팅의 산물입니다. 요즘 샴페인 전용 글라스는 볼이 점점 넓어지는 추세이지만 그래도 볼이 큰 잔을 뛰어넘지는 못합니다. 샤르도네처럼 볼륨감이 있거나 비오니에처럼 아로마가 폭발하는 품종도 레드 글라스처럼 볼이 넓은 잔을 선택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지허 스페판 리카르드 세일즈 이사.  최현태 기자

◆장인의 손길에서 탄생하다

 

보통 글라스는 샴페인, 화이트, 보르도, 부르고뉴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지난해 9월부터 금양인터내셔널을 통해 수입된 뒤 매우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화제를 모은 독일 지허(Gieher) 글라스는 접근방식이 많이 다릅니다. 화이트, 레드 구분 없이 소비자 취향에 따른 특정 캐릭터를 잘 느낄 수 있도록 글라스를 디자인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들이 특정한 향과 맛을 더 느끼고 싶다면 그 캐릭터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글라스를 선택하면 됩니다. 한국을 찾은 지허 스페판 리카르드(Stefan Richard) 세일즈 이사와 함께 오묘한 글라스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실비오 니체 소믈리에.  

지허 글라스의 탄생은 독일 드레스덴에서 유명한 와인바와 샵을 운영하는 ‘WEIN/KULTUR/BAR’ 오너 이자 유명 소믈리에 실비오 니체(Silvio Nitzsche)가 지허측에 소비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와인 글라스를 요청하면서 시작됩니다. 2018년 잡지 데어 파인쉬메커(Der Feinschmecker)에서 선정한 독일 최고의 소믈리에 10인에 선정된 그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등에서 20년동안 풍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86년에 설립된 지허는 가족경영으로 운영되는 크리스탈 제품 제조 업체입니다.

 

지허 패밀리.

“실비오가 어느날 크리스탈 제품을 전문적으로 만들던 지허측에 특별한 디자인의 글라스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소비자들이 와인 종류에 따른 글라스 매칭을 상당히 어려워하기 때문에 레드, 화이트 구분 없이 소비자가 편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글라스를 원했죠. 사실 기존 제품들은 품종에 따라 와인 글라스를 고정해 소비자들이 맛과 향을 제대로 느끼는데 한계가 있었답니다. 이에 연구 끝에 내가 원하는 맛과 향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와인 캐릭터에 따라 글라스 형태를 구분한 지허 비전(VISION)이 탄생합니다.”

 

와인 글라스 부위별 명칭.
지허 글라스 마우스 블로운 제조 공정.  홈페이지

지허 글라스는 크리스탈 장인 20여명이 모든 공정을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마우스 블로운(Mouth Blown)’으로만 만듭니다. 와인 립부터 베이스까지 마우스 블로운으로 만드는 일체형 글라스는 지허가 유일합니다. 다른 제품은 입으로 불어서 만들어도 보울과 스템을 접합하거나 스템과 베이스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만듭니다. 마우스 블로운으로 만들면 글라스의 탄성과 내구성 매우 뛰어납니다. 따라서 식기세척기 사용도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보울 바닥의 물결치는 디자인이 아주 독특한데 기계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디자인입니다. 림부분도 매우 얇아서 입에 와인이 닿았을 때 감촉이 뛰어 납니다.

 

지허 보울 바닥 웨이브 디자인.
지허 웨이브 디자인. 인스타그램

“물결치는 모양으로 만들어 표면적이 넓습니다. 이는 와인의 풍미를 발현시키기 위해서죠. 디캔팅이 글라스에서 이뤄지도록 디자인 한겁니다. 각 글라스마다 지름 사이즈와 높이가 다른데 이를 통해 와인의 아로마가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답니다. 너비는 넓고 높이는 높으며, 림부분은 좁아 와인을 코로 맡게 될때 특정 향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스템이 긴 이유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글라스의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긴 스템이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알게 됐답니다.”

 

지허 글라스. 인스타그램

◆취향 맞춤 글라스

 

지허 글라스는 모두 6종이 수입되는데 대표적인 4종을 살펴봅니다. 인텐스(INTENSE)는 집약적이고 강렬한 느낌에 집중하고 싶을 때 적당합니다. 풍부하고 잘 숙성된 파워풀한 화이트나 레드 와인, 투박한 산미를 지닌 화이트 및 레드 와인, 어리거나 중간 정도 숙성된 보르도 와인을 잘 표현합니다. 입구가 좁아지는 이 잔은 아로마를 똘똘 뭉쳐 와인 잔 밖으로 강력하게 내보냅니다. 산도는 과일 향기 속에서 조화롭게 녹아들어 풍부한 향의 전체적인 느낌을 완성합니다. 와인을 충분히 산소와 접촉시켜 주기 때문에 디캔팅이 필요한 와인을 디캔팅 하지 않아도 이상적으로 마실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지허 인텐스.  인스타그램
지허 밸런스드. 최현태 기자

밸런스드(BALANCED)는 섬세한 아로마를 강조합니다. 부르고뉴나 피에몬테처럼 매우 복합적이고 섬세한 화이트와 레드 와인을 잘 표현합니다. 또 매우 화려한 로제 와인이나 올드 빈티지 샴페인 등 다양한 아로마를 원할 때 사용합니다. 섬세한 구조 때문에 디켄팅을 하면 안되지만 공기와의 접촉이 필요한 와인에 적합합니다.

 

프레쉬(FRESH)는 신선함이 강조되는 화이트, 레드, 프로세코, 가벼운 로제를 즐길 때 적합합니다. 신선한 산도를 증폭시키고 와인의 부케를 강조해 일반적인 스파클링 와인 잔에서 강한 버블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는 활기차고 경쾌한 특징을 느끼는데 도움이 됩니다.

 

지허 밸런스드. 인스타그램

스트레이트(STRAIGHT)는 리슬링, 소비뇽블랑 등 단일 품종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프루티하고 아로마가 풍부한 레드와 화이트 와인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반영됩니다. 가볍지만 아로마틱한 레드 와인도 맛과 향을 순수하게 표현합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selles) 심사위원, 소펙사 코리아 소믈리에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루아르, 알자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