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지역에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본사 건물이 있다. 지난 10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 과정에 참여해 이곳을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가디언 사옥 자체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건 가디언 바로 맞은편에 지어지고 있는 초대형 건물이었다. 가디언 본사 건물 내부에서 보면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그 건물은 구글의 신사옥이었다.
가디언을 향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높아져 가고 있는 구글 신사옥을 보며 가디언의 한 직원은 “구글 사옥이 다 지어지고 나면 가디언 사옥은 그 그늘에 가려져 햇빛조차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며 “마치 지금 디지털 분야에서 빅테크(거대기술기업)와 언론사의 관계 같다”는 자조적 농담을 했다. 장난스러운 말이었지만 인공지능(AI) 시대에 들어선 언론계에선 마냥 웃어넘기기 힘든 이야기다.
2022년 11월 챗GPT의 등장으로 전 세계는 생성형 AI의 새로움과 놀라움에 매료됐다. AI 시대는 사회의 그 어떤 분야도 피해갈 수 없는 공고한 흐름이 됐고, AI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한 전 세계 언론사들의 고민도 시작됐다. 생성형 AI는 언론인들에게 무척 유용한 도구이자 비서가 될 수 있다. 많은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라든가 오랜 시간이 드는 자료 정리, 과거 정보 검색 등에 생성형 AI는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영미권의 여러 언론사는 이미 이런 AI의 유용함에 주목해 자사 기자들이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내부용 AI 도구를 개발하거나 독자를 위한 AI 챗봇을 선보이고 있다.
AI는 이처럼 언론사들에 유용한 측면도 많지만 중요한 건 대응 적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언론사들의 경우 영미권 언론사들과 비교해 아직 AI 대응에 소극적인 곳이 많다. 기본 중의 기본인 AI 활용 원칙이나 가이드라인조차 마련하지 않은 곳이 대다수다.
AI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마냥 손 놓고 있다가는 언론사들은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가진 빅테크에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뉴스 아카이브 데이터를 내어주고 의존하는 처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AI 시대에 빅테크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대등한 파트너로 공존하고자 한다면 언론사도 AI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함이 자명한 시점이다.
기자들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조만간 AI 기자가 등장해서 우리 다 밥그릇 잃을 거야”라는 농담을 심심찮게 주고받아왔다. 일상적으로 단순한 보도자료를 처리해야 하는 경우나 유명인의 말을 그대로 기사로 바꾸는 이른바 ‘받아쓰기 보도’를 할 때 자조적으로 ‘AI 기자’를 언급하기도 한다. 농담의 껍데기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꽤나 진지한 걱정이다. AI가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을 대체한 미래에 기성언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담겨 있다.
200년 역사의 관성을 딛고 AI 대응에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여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는 가디언도 빅테크의 그림자에 갇히는 걸 경계한다. 이미 가디언보다 AI 대응에 한참 뒤처진 대다수 한국 언론사가 AI 대응에 계속해서 손을 놓고 있다가는 빅테크의 그림자 안에서 햇빛 한 점 받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