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부르며 은행앱 깔고 멋대로 이체… 사기 인지 땐 ‘쪽박’ [심층기획-고령층 울리는 리딩방]

모집책들, 친근하게 다가와 노인들 현혹
앱 이용 서툰 점 악용해 계좌서 돈 빼가
반환 요구땐 손실봤다며 일부만 돌려줘
경찰 “외형상 법인, 실상은 유령회사”

최근 2년 가상자산 불법 피해 1조원
비트코인 고공행진 속 범행 더 극심
노후불안 어르신 먹잇감 되기 쉬워
“피해자 중 사기인 줄 모르는 경우도”

“‘어머님, 어머님’ 하고 따르며 원금은 무조건 보장해 준다는 말에….”

 

서울에 사는 김선화(가명·64)씨는 올해 초 ‘주식과 가상자산(코인) 투자로 돈을 불려준다’는 ‘A투자연구소’의 유튜브 광고를 보고 해당 연구소가 운영하는 카카오톡 대화방 링크를 클릭했다. 김씨는 이후 대화방에서 “얼굴을 직접 보고 투자자문을 받으시라”는 업체 직원의 권유로 3월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해당 연구소 사무실에 방문했다.

 

김씨는 이곳에서 “우리 전문가들의 투자자문을 받아 투자를 하면 원금 보장은 물론이며 무조건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김씨를 안내한 직원은 그를 ‘어머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큰 수익이 날 테니 앞으로 돈 쓸 생각만 하시면 된다”고 기대감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직원은 디지털 금융거래를 할 줄 모르는 김씨의 휴대전화에 은행 애플리케이션 등을 직접 설치하고 조작해 김씨 은행 계좌에서 3000만원 상당을 자신들의 계좌로 이체했다. 이후 김씨는 6월까지 추가로 두 번 더 해당 사무실에 방문했고, 직원들은 같은 방법으로 총 1억원가량을 이체했다.

 

해당 업체는 이렇게 출금한 돈을 김씨의 동의 없이 가상자산과 선물옵션 등 고위험 투자상품에 투자했다. 이후 자신이 사기에 걸려들었음을 감지한 김씨는 “돈을 돌려 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업체는 “투자 손실이 났다”며 8000만원을 제외한 2000만원 상당만 반환했다. 김씨는 A투자연구소라는 상호로 법인을 설립한 대표자 박모씨와 본부장 B씨, 자신에게 투자를 유인하면서 접근한 직원 2명 등 4명에 대한 고소장을 10월 서울 서부경찰서에 접수했다.

◆피해액 연 1조원↑…내년 더 증가 전망

 

17일 세계일보가 입수한 A투자연구소의 홍보자료를 보면 “국내 유명 증권사의 수익률 1위 트레이더를 섭외해 무료 종목상담을 제공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명 경제방송채널에 출연한 한 투자 전문가를 캡처한 화면과 “A투자연구소에서만 기법을 공개한다”는 문구를 병치해 전문가가 보장된 큰 수익률을 내주겠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서울 일선서의 한 수사과장은 “가상자산 관련 (사기) 사건은 업체를 바꿔가며 하루에도 두세 건씩 들어온다”며 “외형상 법인의 꼴을 갖췄지만, 실상은 돈을 뜯어내기 위한 가짜 회사들”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년간 가상자산 불법행위에 따른 국내 피해 규모는 1조원대를 기록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가상자산 사기 관련 피해액은 2020년 2136억원에서 2021년 3조1282억원으로 급증했고, 이른바 ‘크립토 윈터(가상자산 침체기)’였던 2022년 피해 규모가 전년 대비 감소했지만 1조192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피해액도 1조415억원을 기록했다.

가상자산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며 관련 사기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커진 셈이다.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출시 등으로 가상자산 가격 상승이 이어지면서 국내 가상자산 시가총액은 55조3000억원을 기록, 지난해 말보다 27%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비트코인이 연일 역대 최고가를 쓰며 고공행진을 거듭하자 가상자산에서 단기수익을 추구하려는 투자자가 늘어 향후 이를 노리는 사기 행각도 더욱 확산할 우려가 크다고 전망한다.

 

조재우 한성대 블록체인연구소 교수는 “일반적으로 가상자산 상승장 때 사기도 비례해서 느는 경향을 보인다”며 “내년이 가상자산 사이클의 피크가 될 것이며 알트코인(비트코인 외 가상자산) 장이 온다는 등의 전망이 나오는 만큼 여러 ‘밈 코인’이 상승하고, 이 영향을 등에 업고 사기를 치려는 세력도 많아질 위험이 높다”고 설명했다.

◆‘노후불안·디지털 문맹’…먹잇감된 노년층

 

이런 상황에서 김씨 같은 고령층의 노후자금은 사기범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다. 대검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사기 범죄 피해자 중 61세 이상 비중은 2018년 11%에서 2022년 15.2%로 늘었다.

 

서울회생법원 개인파산사건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개인파산자 중 60대 이상은 49.64%로 전체 연령대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특히 주식과 가상자산 등 투자 실패와 사기 피해를 파산 원인으로 꼽은 비중은 11.8%로 2021년(2.07%)에 견줘 5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노년층이 가상자산과 같은 신종 투자 사기의 덫에 걸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정보에 어둡고 사기 여부를 판별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올해 발간한 디지털정보격차 조사 결과에 따르면, 70대 이상 국민의 디지털 정보화 역량은 일반 국민 수준(100점)의 30.2%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연금이나 저축에 의존해 금전적 여유 없이 생활하는 노년층일수록 사기범이 내세우는 ‘투자 기회 제공’이나 ‘재정 문제 해결’ 같은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대수명은 늘어났지만 노후 준비가 부족한 상황 탓에 금융 투자에 뛰어드는 고령자가 늘면서 복잡하고 다양해진 투자 사기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주연 한국사기예방국민회 대표는 “고령층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기 범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쉽게 속는다”며 “노후 준비와 생활비가 부족한 노인 입장에선 ‘고령 연금이라 생각하면 된다. 한 달에 얼마씩 통장에 꽂힌다’며 다가오는 사기 유혹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코인이 기축통화 될 것이다’라는 등 생경한 이론을 펼치는 모집책을 만난 고령층은 ‘나만 세상에 뒤처져 있었나 보다’ 하며 사기꾼을 신뢰하고 돈을 맡기게 된다. 노인들을 가지고 놀다 등쳐먹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일선서의 한 수사과장은 “젊은 사람들은 사기 수법을 대번에 알아채지만, 가상자산 사기로 뒤늦게 경찰에 찾아오는 고령 피해자 중에는 이런 유형의 사기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재범을 부추기는 낮은 형량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한다. 김 대표는 “사기를 쳐서 감당해야 할 위험보다 사기를 쳐서 얻는 수익이 더 많은 한 사기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재범 방지를 위해선 가상자산 사기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쪽으로 양형기준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도 “과거 다단계 사기범들이 현재는 가상자산으로 넘어와 피해자들을 현혹하고 있다”며 “가상자산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는 비교적 안착한 반면 금융범죄 처벌 수위가 약해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