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내년 금리 인하폭 축소를 시사하자 국내외 주식시장이 급락하고 환율이 요동쳤다. 원·달러 환율은 1450원을 돌파해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코스피와 코스닥은 2% 가까이 하락했다. 당분간 달러 강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여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기업과 소상공인, 환율에 민감한 유학생의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17.5원 상승한 1453.0원으로 출발해 1450원 아래에서 움직이다가 1451.9원에 주간 거래(오후 3시30분)를 마쳤다. 종가 기준 환율이 1450원선을 웃돈 것은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3월13일(1483.5원) 이후 15년 9개월 만에 처음이다.
그간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이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졌으나 비상계엄 사태 직후인 지난 4일 새벽 일시적으로 1446원을 돌파한 바 있다. 이후 1430원대 후반에 머물며 1440원을 위협했지만 2022년 10월25일 레고 사태 때 기록한 고점(1444.2원)을 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 연준이 이날 새벽 매파적 금리 인하를 단행하자 전문가들이 올해 고점으로 전망한 1450.0원마저 단숨에 뛰어넘었다.
미 연준은 18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고 시장의 예상대로 기준금리를 종전 대비 0.25%포인트 내린 연 4.25∼4.50%로 결정했다. 더불어 앞으로 금리 인하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시사하면서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오늘 발표한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 금리 조정의 ‘폭’(extent)과 ‘시기’(timing)라는 표현을 통해 금리 추가 조정 속도를 늦추는 게 적절한 시점에 도달했거나 그 부근에 도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밝혔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점도표(FOMC 위원들의 향후 금리 수준 전망을 표시한 도표)상 내년 정책금리 전망 중앙값이 지난 9월 회의보다 2회 축소(4회→ 2회)된 것만으로 매파적인데 심지어 대다수 위원(14명)이 2회 이하 인하로 의견을 모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웰스파고는 “사실상 내년 1월 금리 인하 가능성은 사라졌다”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영향을 반영하기 시작하면 연준의 추가 인하 여력은 더욱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날 108선을 웃돌며 2022년 11월11일(108.44) 이후 2년1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환율 방어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1420∼1430원 이하로 내려가기는 힘들 것”이라며 “글로벌 위험회피 심리가 지속되고 트럼프발(發) 충격이나 돌출 변수가 나온다면 환율은 지금보다 20원 정도 더 오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달러 강세 기조는 내년 초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당초 내년 평균 환율을 1370원으로 봤는데 FOMC 충격으로 15원 정도 더 올려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코스피는 이날 전 거래일 대비 48.50포인트(1.95%) 내린 2435.93, 코스닥은 13.21포인트(1.89%) 내린 684.36으로 각각 장을 마쳤다. 전날 코스피 시장에서 4000억원 가까이 순매수하며 7거래일 만에 ‘사자’로 돌아선 외국인은 하루 만에 다시 4295억원어치 순매도했다. 전날까지 16거래일 연속 매수 우위로 코스피를 떠받치던 기관마저 이날은 5086억원 순매도했다.
◆수입 기업·소상공인 수익성 악화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환율에 민감한 기업과 해외 유학생과 장기 체류자, 사업가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철강재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 석탄 등 원재료를 수입하는 철강업계는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해졌다. 포스코를 포함한 국내 주요 철강사는 제품을 수출해 벌어들이는 달러로 원재료를 수입하는 방식으로 고환율 위기에 버티고는 있지만, 중국산의 글로벌 저가 공습으로 수요가 줄면서 중장기적인 리스크가 커진 상황이다.
한 해 10억배럴가량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정유사들은 결제를 달러로 하는 만큼 환차손 위험이 커졌다. 가뜩이나 정제 마진 악화로 올 3분기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의 정유부문 합산 영업손실은 1조4592억원에 달했다.
배터리업계에선 고환율 여파로 그동안 추진한 투자가 고정비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3분기 기준 달러화 부채 6조8284억원, 유로화 부채 2조6610억원을 보유 중인데, 달러 강세에 따른 원화 가치 하락으로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하면 환차손으로 세전 이익은 2389억원 줄고, 같은 조건 유로에선 2322억원의 세전 손실이 발생한다.
삼성SDI도 지난해 말 기준 달러 부채가 4조4312억원, 유로 부채가 648억원에 달한다. 이는 달러당 1306원, 유로당 1412원의 평균 환율 기준인 만큼 올해 부채는 더 불어날 전망이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가 마련한 간담회에 참석한 8개 기업의 경영경제연구소장들은 가장 큰 대내 리스크로 환율 상승을 꼽았다. 원화 약세는 수입물가 상승을 초래해 민간소비 냉각, 기업 생산비용 증가로 이어져 투자·고용 위축 등 내수경제 부진이 더욱 깊어진다는 우려에서다. 환율 리스크에 비우호적 대외 환경으로 수출 경쟁력마저 약해지면 향후 수년간 한국 경제의 반등 동력이 지연될 수 있다고도 입을 모았다.
◆해외 유학생·체류자도 ‘비명’
소상공인들도 고통을 호소한다.
서울 마포구에서 덮밥집을 운영하는 장모(45)씨는 100% 수입에 의존하는 주재료 연어 가격의 폭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씨는 “원물 수입단가가 상반기의 1.2배 수준으로 올랐는데, 설상가상으로 환율까지 급등해 지난 한 주만 8% 정도 더 뛰었다”며 “연말 수요가 몰릴 시즌인데도 연어덮밥 메뉴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이라고 말했다.
잡화류를 수입·판매하는 개인사업자 이모(34)씨는 “성탄절 선물용으로 지난달 발주한 물건의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환율 탓에 500만원이 날아갈 판”이라고 토로했다.
해외 유학생을 둔 부모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 8월 자녀를 미국의 한 주립대에 입학시킨 윤모(52)씨는 “상대적으로 학비가 저렴한 학교임에도 환율이 올라 부담이 너무 크다”며 “아들이 빠듯하게 생활하며 고생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합격해 내년 출국을 앞둔 대학생 김정인(21)씨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출국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털어놨다.
한편 외환 당국은 달러 매입 수요를 줄이기 위해 이달 말로 만료되는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 계약 기한을 내년까지 연장하고, 한도도 기존 500억달러에서 650억달러로 증액하기로 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환 헤지 비율을 최대 10%로 상향하는 기간을 내년까지 연장해 시장에 달러 공급을 늘리기로 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기업들의 외화 결제와 대출 만기의 탄력적 조정을 적극 검토해달라고 이날 은행권에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