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노력에 동맹국들 중에서 독일이 가장 먼저 가담하는 모양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미국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나라가 독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주목되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19일(현지시간) dpa 통신에 따르면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참석 도중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독일 정부 대변인은 “두 지도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가능한 한 빨리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지속 가능한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통화 내용을 소개했다. 통화에서 숄츠는 트럼프에게 “독일은 필요한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지원할 것”이라고 거듭 다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과거 숄츠가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나 통화 이후 공개된 대화 내용과는 결이 다르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를 위한 군사 지원’에만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번에는 처음으로 ‘평화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쟁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통해 전쟁 피로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미 대선 기간 내내 “내가 당선되면 취임 후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한 트럼프를 상대로 숄츠가 기꺼이 공감 의사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숄츠는 우크라이나에 타우러스 미사일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트럼프와 ‘코드’를 맞추는 태도를 보였다. 장거리 공대지 미사일 타우러스는 500㎞ 이상의 긴 사거리와 높은 정확도를 자랑한다. 그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독일 정부에 타우러스 인도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숄츠는 지난 16일 트럼프의 기자회견 내용을 거론하며 “내가 옳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가 미국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도록 허가한 바이든 행정부의 결정에 대해 “매우 어리석다”,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등 표현을 써가며 맹비난했다. 전쟁을 시급히 끝내야 할 판국에 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를 자극해 확전으로 이어지게 만드냐는 힐난으로 풀이된다. 숄츠는 트럼프의 이 같은 인식에 적극 편승한 셈이다.
숄츠는 트럼프 당선 직후 이미 한 차례 전화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 통화다. dpa는 “독일 총리가 아직 취임하지 않은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두 차례 대화한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1기 집권기에 독일을 눈에 띄게 박대했던 트럼프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는 임기 첫해인 2017년 백악관을 찾은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거부했다. 메르켈 정부를 향해 “국방 예산을 대폭 늘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더 많은 기여를 하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비록 실행에 옮기진 않았으나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주독미군을 철수하는 방안까지 구상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내내 상대했던 독일의 정상은 메르켈이었다. 일각에선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미·독 관계가 얼마나 나빴었는지 잘 아는 숄츠가 트럼프 재집권을 앞두고 잇따라 유화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오는 2월 총선을 앞둔 숄츠에겐 미·독 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매우 중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