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18일 새벽 3시쯤 머리를 빡빡 깎고 양복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완용의 집으로 가서 그 집 두 칸을 불태워 버렸다. 이날 도성 안팎의 인민들은 을사 5조약이 조인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다. 각 부의 많은 관리가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식하고 맡은 사무를 모두 폐지해 버렸다. 각 학교의 학생들도 모두 학업을 그만두었다. 18일 아침부터 일본 병사들이 각기 30명씩 각부 대신의 사저로 가서 지키며 호위했다.”(584쪽)
1905년 11월17일, 일제는 경성과 경복궁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이완용과 이근택 등 조정 대신들을 윽박질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압적으로 처리한다. 지식인 정교는 당시 신문 기사와 자신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을사늑약에 대한 민중들의 반응을 역사책 『대한계년사』에서 이 같이 전했다.
평민 출신의 공인 지규식 역시 을사늑약에 서명한 다섯 대신 가운데 한 명인 이근택에게 그 집의 식모가 일갈했다는 에피소드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다.
“...방금 서울 소식을 들으니, 이근택이 자신이 군부대신으로서 ‘한국을 일본이 보호한다는 문서에 조인하여 준 뒤 집으로 돌아가서 온 집안 권속들에게 큰 소리로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일어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하고는 서로 더불어 기뻐하고 축하했다. 이때 그 집 반빗아치 여인이 바야흐로 칼을 들고 도마 위에 고기를 썰다가 나라 팔아먹은 이야기를 창문 밖에서 들었다. 이 여인은 대단히 통한을 이기지 못하고 칼로 고기 도마를 크게 치면서 큰 소리로 질책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러한 역적인 줄 모르고서 이런 흉악한 놈에게 몸을 두었구나!’하고 칼을 던지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또 한 침모가 있었는데, 똑같은 소리를 지르고 크게 꾸짖고 마침내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이는 여협 중에 특이한 열녀이다. 남아인 자가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저 두 여협은 가히 대한의 불후불멸의 빛이라고 이를 만하다.”(586쪽)
그 동안 1897년 제국의 성립부터 1910년 일제 강제합방까지 존속했던 대한제국을 둘러싼 평가는 늘 엇갈렸다. 많은 이들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약육강식의 시대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해 망국의 초래했으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반대편에선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니 긍정적인 면도 평가해야 한다는 맞서곤 했다.
대한제국을 둘러싸고 왜 이처럼 엇갈린 평가가 이어져온 것일까. 대체로 대한제국의 실정을 보여주는 자료에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 있는데다가, 일제가 편찬한 『고종·순종 실록』이 끼치는 부작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특히 『고종·순종 실록』의 경우 일제가 편찬했다는 점에서 찬술 의도와 방식, 내용에 대한 엄밀한 검토와 비판이 이뤄져야 했지만, ‘실록’이라는 주술에 걸려들어 맹목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근현대사의 ‘아픈 손가락’ 대한제국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현명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일 것이다.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역사를 가르쳐온 저자는 책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휴머니스트)원에서 대한제국을 관통했던 다섯 사람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저자가 역사의 무대로 소환한 첫 번째 인물은 서구 문물을 앞장서서 수용한 대표적 식자이자 국내외 인사와 만나며 광범위한 활동을 벌인 정치인 윤치호다. 그는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국내외 정세와 사회 동향을 상세히 기록한 『윤치호 일기』를 작성했는데, 일제의 정책에 대한 복잡한 시각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 등이 잘 드러나 있다는 평가다.
두 번째 인물은 천주교를 공격적으로 포교하면서 대한제국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프랑스인 신부 귀스타브 뮈텔. 그는 조선 교구장에 임명된 1890년부터 1933년까지 외국 열강의 움직임과 고종을 비롯해 조선 정계의 주요 인물과의 대화가 담긴 『뮈텔주교일기』를 남겼다.
이어서 당대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관점에서 각각 역사책 『대한계년사』와 『매천야록』을 남긴 지식인 정교와 언론인 황현이 있다. 마지막으론 자기를 왕실과 관부에 조달하는 평민 출신의 공인으로, 1891년부터 1911년까지 매일 작성한 일기 『하재일기』를 통해서 일반 백성의 시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상공인 지규식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저자는 이들 다섯 사람의 기록과 인식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수립부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헤이그특사 파견과 군대 해산, 의병전쟁과 일제 강제병합에 이르는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비교 서술함으로써 통사적인 면모를 확보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12일 환구단에서 대위에 오른 뒤 태묘와 사직에 고사를 하고 정전으로 환어해 백관의 축하표전을 받으며 예식을 행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인 윤치호는 일기에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오늘 새벽 4시 폐하께서는 천신께 제물을 바쳤고, 6시에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즉위했다. 12시에 새로운 황제를 감축드리러 궁으로 갔다. 하지만 황제 즉위식은 개최되지 않았다. 고인이 된 명성황후에게 황후의 칭호를부여하는 문제 등과 관련되어 거창한 의식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세차게 쏟아진 비는 이 소극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안타깝게 만들었다.”(141쪽)
1904년 2월,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러일전쟁이 한반도와 뤼순 등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발발한다. 전쟁 과정에서 일제는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을 압박했고,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윤치호는 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한국은 부흥할 수 없을 거라고 10월20일 일기에서 적고 있다.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당사자 어느 한편의 패배 가능성이 아니라, 어느 편이 전쟁에서 승리하든 한국이 부흥할 가능성은 없으리라는 철저한 절망감이다. 어떤 경우든 선택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459쪽)
일제는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8월29일에야 병합의 내용을 담은 대한제국의 황제의 조칙을 일반에 공개한다. 정교는 황제의 조칙을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동향의 평화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이쪽과 저쪽이 서로 합하여 한 나라를 이룸으로써 서로 만세토록 영원할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들어서 이것을 내가 지극히 신뢰하는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께 넘겨주기로 결정한다.”(890쪽)
프랑스인 신부 뮈텔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소식을 일반 사람들보다 일찍 알게 되는데, 그는 8월26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빈 비르브리트씨 덕분에 한국이 병합되고 그 조약이 29일에 공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협상에서 전 황제와 현 황제가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속국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주님은 이 슬픈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896쪽)
우리는 당대를 살아간 다섯 사람의 구체적인 경험과 기록, 논평을 통해서 편견도 꾸밈도 없는 대한제국의 실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