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전환기의 신뢰

한국 비상계엄사태 세계가 타전
가자·우크라戰 압도할 만큼 충격
외교시험대 오른 韓 회복 탄력성
여야 떠나 합심해 증명해야할 때

“우리가 해온 일의 많은 부분은 초당파적(bipartisan)이고, 많은 부분이 이전 (정부)의 우리의 관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 대해 어떻게 (경쟁적인 관점으로) 생각할 것인가 등에 대한 초기 프레이밍은 많은 부분 트럼프 행정부 (1기)에서 형성된 것이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은 19일(현지시간) 워싱턴 네셔널프레스빌딩에서 인도태평양 지역 언론들을 초청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을 주제로 연 라운드테이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들은 주로 현재 인수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와 현재 미국 정부 간 정책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을 했다. 한·미·일 협력의 연속성을 물은 일본 기자, 오커스(AUKUS:미·호주·영국 안보협력체)의 연속성을 물은 호주 기자, 트럼프 행정부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해온 것처럼 서필리핀해(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의 이익을 보장하는 일을 할 것인지를 물은 필리핀 기자 등 행정부 전환의 시기에 인태지역의 정책 변동에 저마다 다양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홍주형 워싱턴특파원

이 질문들에 대한 캠벨 부장관의 답변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성과인 인태전략의 많은 부분이 초당파적이며, 이 정책이 중국을 다루는 관점의 초기 작업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그간의 정책 성과가 무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그 시간 의회에서는 여야 합의 예산안이 좌초되며 셧다운 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최근 미국 정치의 양극화 위기를 많이 언급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외교안보정책만큼은 연속성을 강조하고, 차기 행정부에서도 인태전략의 핵심 요소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외신을 상대로 안심시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시간 3일 비상계엄이 발발한 뒤 워싱턴에서 약 3주간 한국 기자로서 기이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비상계엄 발발 직후인 2일(현지시간) 국무부 브리핑에서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 앞에 한국의 계엄 문제가 가자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압도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참담했고, 동네 이웃들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주요 언론에서 모두 한국의 계엄 사태를 머리기사로 다뤘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 관련 행사들이 줄줄이 축소·취소됐고, 숙련된 외교관인 캠벨 부장관이 직접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을 ‘심한 오판(badly misjudged)’이라고 매몰차게 평가하는 것도 이례적이었다. 캠벨 부장관은 이날 라운드테이블에서 자신의 당시 발언과 관련한 질문에 추가 답변을 하지는 않았다.

탄핵 관련 절차에 돌입한 지금 워싱턴의 분위기는 외부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대해 높게 평가하면서, 속으로는 다음 단계를 우려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의 차기 정권은 과연 한·미·일 협력에 우호적일지, 한·일관계가 후퇴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질문이 오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기사를 꾸준히 쓰는 것을 보면 그 관심을 알 수 있다.

사실 정권 교체 이후의 한국의 정책 연속성에 대한 의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난해 한·미·일 협력의 본격화와 함께 시작됐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가 있는 외교정책의 경우 상대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한 신뢰는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정책의 변동이 심하고, 심지어 이번에는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관계의 사상적 기초로 삼았던 ‘민주주의 연대’의 본질까지 흔들어 버렸으니 신뢰가 남아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갑작스럽게 한국은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 행정부 전환기에 정상외교 등에서 실기(失期)할 수 있다는 우려도 우려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앞에 회복 탄력성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탄핵과 관련된 빠른 절차 진행과 함께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외부 청중에 대한 신뢰 회복이 최우선의 과제가 됐다. 여야를 막론하고 향후 무거운 과제를 물려받게 될 이들에게 이 같은 문제의식이 없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