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만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21일(현지시간)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난달 대선 승리 이후 국내 정·재계 인사를 대면한 건 정 회장이 처음이다. 탄핵 정국으로 국내 외교통상 분야가 사실상 진공상태로 빠져들면서 글로벌 인맥을 쌓아온 재계 인사들의 대미(對美) 외교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정 회장은 이날 미국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길에 오르면서 국내 언론과 만나 “트럼프 당선인과 식사를 함께했고, 별도로 여러 주제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를 했다. 대화는 10분에서 15분 정도 나눴다”고 밝혔다. 다만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지난 16일부터 이날 오전까지 트럼프 당선인의 자택인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 머물러왔다. 이번 방미 일정은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의 초청으로 이뤄졌으며, 트럼프 당선인의 식사 회동도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이뤄졌다고 신세계 관계자는 말했다.
애초 정 회장은 마러라고 리조트에 3박4일 일정으로 머물 예정이었으나 체류 기간을 이틀 연장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트럼프 당선인과의 만남이 성사될지 관심이 집중됐었다. 미 대통령 취임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각국이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접점을 늘리기 위한 외교전에 돌입한 가운데 국내에선 국정 표류로 재계 수장들의 민간사절 역할이 절실한 탓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트럼프 당선인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질문에는 “제가 무슨 자격이 있나”라고 일축하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트럼프 당선인이 한국과 관련한 언급을 했느냐’는 질문에 “특별히 언급한 부분은 없었다”며 트럼프 당선인이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2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도 취재진에게 “트럼프 당선인과 한국 정세에 대해 직접 얘기 나눈 부분은 없다”며 “(트럼프 주니어 등 측근이) 한국 상황에 관심을 보이면 대한민국은 저력 있는 나라이니 믿고 기다려달라, 빨리 정상을 찾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출장과 관련해 “트럼프 주니어가 많은 인사를 소개해줘 많은 사람과 교류하면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며 “일론 머스크를 만났고, 짧은 인사 정도만 나눴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당선인 등이 한국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는 “거기까지는 제가 말씀드릴 처지가 아니다”라고 말을 아꼈다.
정 회장은 내년 1월20일 워싱턴 미국 연방의회에서 열리는 트럼프 당선인의 제47대 대통령 취임식 초청 여부에 대해 “취임식 이야기는 특별히 연락받은 바 없고 정부 사절단이 꾸려지는 대로 저한테 참여 요청이 오면 기꺼이 응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정 회장이 정부 리더십 공백 속 한국에서 유일하게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며 그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 기업들도 트럼프 당선인과의 관계 구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회동 자체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행정부 전환기에 들이닥친 탄핵 정국에 트럼프 당선인과 한국 정부 간 공식적인 접촉은 주춤하지만, 그 공백을 기업인 외교가 메울 수 있다는 평가다. 트럼프 당선인 스스로 기업인 출신으로 기업인들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이 있다. 특히 미국에 큰 투자를 하거나, 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에는 더욱 그렇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16일 1000억달러(약 145조) 대미 투자 계획을 밝힌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면서 친밀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정 회장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막후 실세’인 트럼프 주니어와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다는 점도 트럼프 2기 동안 직·간접적으로 한·미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인다. 정 회장과 트럼프 주니어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공통점으로 교분을 쌓았으며,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만큼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올해에만 네 번째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