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오페라 공연 첫날부터 시끌…연출가 “내 이름 빼달라”

이탈리아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모어, 개막 직전 연출 철회하며 제작사 비난
“기획 의도 벗어나, 개런티도 지불하지 않아”
제작사 측 “사전에 수 차례 협의한 제작 의도를 무시…조연출과 함께 사실상 아무 일 안 해”
박현준 예술총감독이 대타로 나서 공연은 정상 진행
운영 미숙으로 개막 공연 전 어수선…‘비싼’ 시야방해석 문제 해결도 시급
세계적 성악가와 지휘자가 보여준 무대 자체는 합격점…무대 웅장함과 LED 생동감도 볼 만

푸치니의 대작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 개막을 앞두고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한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모어가 작품에서 손을 떼며 제작사를 비난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22일 개막한 오페라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연출을 맡기로 했던 다비데 리베르모어는 이날 오전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어게인 2024 투란도트’ 프로덕션(제작사)과 결별하며 그 예술적 결과물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코엑스에서 22~31일 공연되는 오페라 ‘어게인 2024 투란도트’ 포스터.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모어(왼쪽)와 박현준 예술총감독. (c)Eugenio Pini, 연합뉴스

‘어게인 2024 투란도트’는 중국의 거장 영화감독 장이머우 연출로 2003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나흘 동안 11만 관객을 동원하며 야외 오페라 흥행을 이끌었던 ‘투란도트’ 공연의 영광을 재연하겠다는 취지로 제작됐다. 21년 전과 마찬가지로 박현준 한국오페라협회 회장이 예술총감독을 맡았고, ㈜2024투란도트문화산업전문회사가 100억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해 31일까지 공연한다.

 

당초 연출은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2024 투란도트’ 연출가인 다비데 리베르모어가 맡기로 했다. 이날 판매된 공연 책자에도 연출로 소개된 그는 “제가 사랑하는 푸치니의 명작을 들고 서울에 가게 돼 자랑스럽다”며 “우리의 연출 실력으로 한국 관객들의 영혼에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고 인사말을 썼다. 하지만 리베르모어는 공연 전에 돌연 손을 뗐다. 

 

이와 관련, 리베르모어 측은 “프로덕션(제작사)의 일방적이고 지속된 변경으로 리베르모어와 그의 협력자(조연출) 카를로 샤칼루가의 연출 작업이 불가능해졌다”며 “특히 제작진은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투란도트’) 공연의 무대동선을 복사하도록 강요했다”고 제작사 측에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어 “원래 기획 의도와 달리 세계적으로 재능과 전문성을 존중받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4회 연속 개막공연 기록을 세운 리베르모어가 보여주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덧붙였다.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출연진이 22일 개막 공연 종료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리베르모어 측은 또 “제작진과 연출가 사이의 건설적인 대립은 일반적인 관행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러한 협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이는 협력이 아닌 비전문적인 아마추어 수준의 권위주의적 강요였다. 박 감독의 프로덕션은 계약상의 지불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2024투란도트문화산업전문회사 대표를 겸임한 박현준 예술총감독을 비난했다. 리베르모어는 이번 작품은 자신과 무관하며 “완전히 결별한다. 이 제작진과 자신의 이름이 연관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투란도트문화산업전문회사는 반박 보도자료를 내 “그동안 한국 오페라를 우습게 여겨왔던 이탈리아 오페라 관계자들이 이번 ‘어게인 투란도트’에서 다시 한번 한국을 봉으로 아는 추태를 보였다”고 맞받았다. 이어 “그동안 박 감독은 여러차례 2003년 ‘상암동 투란도트’ 버전으로 준비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제작진 의도를 듣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연출하려 했고, 한국 제작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자 갈등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투란도트문화산업전문회사는 “리베르모어 연출 조력자인 샤칼루가가 지난달 25일 입국한 뒤 연출 관련 업무를 전혀 하지 않았으면서도 개런티(보수)를 요구했다”며 “연습에 참여하지 않은 그를 ‘노쇼(No show)’로 간주하고 이탈리아로 돌려보낸 후 박 감독이 연출을 맡아 2003년 ‘투란도트’의 감동을 재현했다”고 반박했다. 또 “공연을 앞두고 리베르모어가 한국에 왔지만 연출과 관련해 도움을 준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개런티를 요구해 박 감독이 ‘불가’ 입장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협박성 발언까지 해 형사적 소송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양 측이 원만한 합의를 못할 경우 개런티 조건 등 계약 내용을 둘러싸고 향후 소송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셈이다.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출연진이 22일 개막 공연 종료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공연은 박 감독이 연출을 맡아 정상적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하지만 운영 미숙으로 첫날 공연은 진통 끝에 막이 올랐다. 공연장 좌석 규모가 사전 예약 판매 당시보다 축소되면서 현장에서 좌석을 변경해야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고, 많은 관객이 몰린 반면 입장권 배부처는 비좁고 안내원들마저 우왕좌왕하면서 큰 혼잡을 빚었다. 이 때문에 공연 시작 시간인 오후 7시30분이 되도 입장하지 못하거나 당초 구입한 자리에 앉지 못한 관객들 사이에서 불만과 고성이 터져나왔다. 제작사 관계자는 “관객들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며 “다음 공연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이 20여분 지나 시작된 후에는 무대 전면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큰 기둥이 좌우 양쪽에 앉은 관객들의 시야를 가려 불만을 샀다. 해당 좌석의 티켓 한 장 값이 30만원, 50만원 하는 자리였던 만큼 화가 난 관객들도 눈에 띄었다. 실제 좌측 객석 앞열 관객 상당수는 무대와 공연장 옆 벽면에 붙은 대형 화면 쪽에 번갈아 시선을 돌리며 관람했다.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3막 공연에선 거의 내내 주인공들의 얼굴이 가려져 고개를 90도로 돌려 화면으로 공연을 봐야 할 정도였다. 이 공연을 보러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모녀 관객은 “30만원이나 주고 산 좌석인데 주역 가수들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며 “사전에 ‘시야 방해석’이란 안내도 없었던 데다 이런 자리를 30만원에 파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시야 방해석을 최소화하는 조치가 시급해 보이는 대목이다.

 

이날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투란도트 역),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칼라프 왕자 역), 소프라노 줄리아나 그리고리안(류 역) 등 세계적 성악가들이 아르헨티나 출신 세계적 테너 겸 지휘자 호세 쿠라가 이끈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꾸민 무대 자체는 합격점을 줄 만했다. 특히 아스믹 그리고리안은 현존 최고의 디바로 불려도 손색 없을 만큼 가창력과 연기력 모두 출중했다. 가로 45m(양 쪽 여유 공간 포함 시 85m), 높이 17m에 달하는 대형 무대 세트와 극 흐름에 따라 다채롭게 바뀌며 무대를 감싸는 LED 기술은 웅장함과 생동감을 선사했다. 이들 외에 마리아 굴레기나와 에바 플론카(투란도트 역), 알렉산드르 안토넨코와 브라이언 제이드(칼라프 역), 다리아 마시에로와 도나타 롬바르디, 박미혜(류 역)가 주역을 번갈아 맡는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렸던 플라시도 도밍고, 파올로 카리야니도 지휘대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