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빛과 눈(雪)빛 사이
기록(記錄) 불가능한 상실이 있다. 처음부터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들의 상실. ‘살아 있음’이 인정되지 않는 삶의 죽음은 공적인 발화의 범위 안에 놓이지 않으며, 따라서 기록될 수 없고, 애도할 수도 없다. 주디스 버틀러는 폭력과 애도의 관계를 고찰하며 이렇게 썼다. “애도가능성은 삶의 출현과 유지의 조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공적 사회를 구성하는 규범적 틀에 따라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삶이다. 흔히 우리가 누군가를 애도하고 추모한다고 할 때, 그의 삶은 반드시 ‘살았던 것’으로서 이제는 끝난 것이어야 한다. 즉 애도 불가능한 삶이란 권력의 프레임 속에서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 삶을 말한다.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닌 삶. 오랫동안 문학은 이들의 상실을 애도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규범의 폭력을 사유하고 윤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를 계속해 왔다.
3. 잠겨드는 ‘꿈’의 말걸기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인선의 집. 금방이라도 단전과 단수로 완벽하게 고립될 그 집에서,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어 있다. 손끝과 손바닥으로 전해지던 가냘프고 따뜻한 감각은 차갑게 놓인 새의 죽은 몸 앞에서 허탈해진다. 언젠가 인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들은 아무리 아파도 죽기 직전까지 횃대에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고.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견디는 거라고. 그러니 새들의 삶은 죽음과 지나치게 밀접해 있어, 켜져 있던 불이 잠시 꺼지듯 순식간에 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마를 인선의 집 마당 한가운데, 마치 사람의 팔처럼 가지를 흔드는 종려나무 아래에 묻는다. 죽은 새를 묻고 돌아오자 집 전체에 들어오던 물과 전기가 끊긴다. 완전히 고립된 그곳에 버려지듯 누워 ‘나’는 생각한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172쪽)
『작별하지 않는다』의 2부는 고열에 시달리며 혼미한 의식 속에 있는 ‘나’가 환영을 보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스스로 ‘죽으려고 이곳에 왔다’는 침통한 고백 끝에 죽은 새와 서울의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의 환상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이 부분에서 무엇이 환상이고 실재인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어디인지, 누가 살고 누가 죽었는지를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린다. 어디까지가 환각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마’가 죽은 것, 인선이 ‘나’를 제주 중산간의 집으로 혼자 보낸 것, 내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쓰러졌던 것, 이 중 실제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만약 그 모든 일이 처음부터 고통에 시달리던 ‘나’가 꾼 꿈속의 일이라면?
이러한 혐의를 등에 업은 채 소설은 진전한다. 분명한 것은 ‘나’와 환영들이 만나고 주고받는 대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함께 앉아 있는 그 공간 곳곳에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멀쩡한 듯 버티다가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새의 가볍고 연약한 생명처럼. 어쩌면 살아 있는 것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정점, 삶과 죽음이 지나치게 가까워져 빈틈없이 맞물린 채 서로의 영역으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번져나가는 그 환상적인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된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악몽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이상한 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다.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간 걸 말이야. 살아 있는 누구도 더 이상 곁에 남지 않은 걸 말이야.
아닌데, 하고 인선이 내 말을 끊고 들어온다.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 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내가 있잖아.(237∼238쪽)
4년 전, K시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한 책을 펴냈던 그해 여름, ‘나’는 벌판에 눈을 맞으며 서 있는 검은 나무들의 꿈을 꾼다. 이름 모를 봉분들의 묘비인 그것들을 향해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고, 나는 봉분들이 잠기지 않게 하기 위해 힘껏 뛰어 보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깨어난다. ‘나’는 이 꿈의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보자고 인선에게 제안했다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프로젝트를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미 작업을 시작했다는 인선의 뜻은 확고하다. “우리 프로젝트 말고 다른 건 생각해본 적 없어, 지난 사 년 동안.”(237쪽) 삶이 아니라 죽음의 방향으로, 아무도, 아무것도 곁에 남지 않은 폐허의 끄트머리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 꿈의 무서운 힘을 ‘나’는 홀로 감당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무력함과 비겁함에 대한 이 수치스러운 고백의 끝을, 환영으로 그를 찾아온 인선은 단호하게 끊어낸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더라도 홀로 꿋꿋하게 백 그루가 넘는 통나무를 깎고 자르던 그 힘으로.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너에게는 내가 있다고.
너무나 무수한 죽음들, 포착될 수도 재현될 수도, 심지어 기록될 수도 없어 ‘검은’ 채로 그저 솟아 있는 봉분들을 덮쳐 오는 바닷물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다만 감각이 마비되지 않아 고통을 속절없이 느끼는 ‘나’의 몸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마비되지 않은 몸이기에 그들의 한없는 고통을 엿보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리라. 이는 『소년이 온다』에 이어 또다시 마주친 학살과 죽음(들)에 대해 말하는 증언 앞에서, 작가 한강이 느꼈을 글쓰기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어려움을 재현 방식의 새로운 시도 ―『소년이 온다』가 그랬던 것처럼 사건의 현장과 그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여러 초점화자들의 입을 통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등의―로 돌파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역사적 사건의 ‘문학적 재현’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지 않다는 저간의 평가는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앞서 던진 질문과 같이, 이 소설의 목적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재현함으로써 살육의 무참함과 권력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데 있는가? 오히려 스스로 고통스러운 자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고통의 물결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그로 인해 글쓰기 자체가 실패하는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데 소설의 궁극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실패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은, 아니 그 자신을 투영한 서술자 ‘나’는 실패한 자다. 검은 봉분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수치스러운 실패자.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야 그 일을 시도해 볼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환상 속에서, 저 대신 그 죽음들을 감당하는 작업을 계속해 온 인선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처참한 실패를 마주한 채 나에게 ‘말을 거는’ 그녀의 존재를, 나와 연루된 타자를, 그 자신의 내부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전유하고 있는 버틀러의 통찰을 잠시 빌리자. “이런 점에서 인간적인 것은 … 오히려 성공적으로 실천된 그 어떤 재현에도 한계로 작용하는 것이다. 얼굴은 재현의 이러한 실패로 인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가능성에서 구성된다.”
나는 취약한 신체라는 근본적인 요소로부터 타자와 연루되어 있고, 그러한 의존성은 비로소 어떤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이때 타자의 존재는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관계없이 나를 찾아오고, 솟아올라 말을 거는 것이다. 인선의 환영은 ‘나’가 글쓰기에 끝내 실패했음을 토로하는 순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무참한 학살의 기록과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이끈다. 4·3과 함께 당시 자행되었던 학살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 신문 기사, 인선이 직접 전해 준 유년의 기억, 어머니인 정심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녀가 직접 수집하고 선별한 폭력의 증거와 기록은 ‘나’에 의해서, 혹은 작가에 의해 가공되거나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자료’의 형태로 소설 속에 그저 ‘놓일’ 뿐이다. 그것은 타자의 얼굴을 재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비로소 구성되는 인간적인 것, 그들을 마주한 ‘나’의 “수동성의 층위”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 노력하는 대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초되는 나의 수동성을 통해 재현의 한계 자체를 드러내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한계로부터 어떠한 가능성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는 소설이다. 애도 불가능한 상실에 대한 애도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의 조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때로는 글쓰기의 진실과 더 가까우므로.
4. ‘건넘’으로써 ‘견딤’을 지속하기
나의 취약함과 수동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만드는 타자의 존재.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을 걸어오는 ‘혼’들의 얼굴은, 내가 짊어져야 할 어떤 책임을 부과한다. 이때의 책임이란 타자가 놓인 상황을 해결하거나 스스로 떠받치겠다는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타자에 반응하게 되기 위한 자원으로 무의지적 민감성을 사용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기동일적인 나의 외부로서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쑥 솟아오르는 타자의 얼굴에 대한 나의 반응, 어떠한 응답을 되돌려보내는 행위. ‘나’의 환상 속에서 인선은 담담하게 고백했었다.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208쪽)다고. 그리고 그 느낌은,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 매장되어 있던 유골들의 사진을 본 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처음 그는 그 유골에 대해 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다 자신의 작업이 실패할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희생자 유족’인 엄마와의 인터뷰 대신 인선은 자신이 카메라 앞에 앉아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늘 자신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가 숨곤 했던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다. 늘 핏기 없고 호리호리하고 숨을 잘 쉬지 못했던 아버지, 동굴 속에서 딸의 손을 꼭 잡고 “속솜허라”(159쪽)라고 속삭였던 아버지, 그리고 고문 피해자인 그를 거두어 평생을 지낸, 학살당한 가족의 유해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 어머니에 대한 기억. ‘나’가 본 그 영화 속에서 “질문들은 편집되었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158쪽)고, 카메라의 초점조차 말하는 인선 자신을 앵글의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에 배치했으며, 화면의 대부분은 “인터뷰이가 방금 뱉은 말을 부인하며 내젓는 팔 같은”(157쪽) 그림자의 일렁임으로 채워져 있다. ‘나’가 실패한 글쓰기의 일부를 인선은, 그 역시 매끄러운 재현의 실패와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기이하게 뒤틀린 ‘불협화음’을 통해 카메라 속에 펼쳐 놓고 있었던 것이다.
느껴져?
성대를 울리지 않고 입술을 달싹여 인선이 물었다.
뭐가, 하고 나는 되물었다.
지금 말이야. 따뜻해졌지 않아? 아주 조금.
그런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이상 한기에 숨이 떨리지 않나. 증류된 기체 같은 무엇이 번져 어른거리고 있나. 캄캄한 보리밭에서 막 눈을 뜬 아이. 인제 오빠 머리 안 이상함지. 밑단이 오므려진 점퍼 속, 고슬고슬한 머리카락이 풀 같이 돋은 아기.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뻗어 뼈들의 사진 위에 얹었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301∼302쪽)
그렇다면 그러한 응답은, 책임은, 메시지는,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 다만 손바닥으로 사진을 어루만지고 카메라 속 화면에 불협화음을 새겨 넣는 저마다의 ‘실패’는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작별하지 않는다』의 전체 구성 중 가장 짧은 분량을 차지하는 3부에는 ‘불꽃’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날의 진실과 기록을 마주하게 된 ‘나’에게 인선은 묻는다. 이제는 조금 따뜻해지지 않았느냐고. ‘나’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갱도에 묻혀 있던 유골들의 사진 위에 손을 얹는다. 망가지고 부서진 육체, 훼손되고 파괴된 연약한 육체를 지녔기에 한없이 취약하지만 한편으로 그 취약함 때문에 한없이 ‘인간적인 것’인 그들과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었을 슬픔과 고통을 서사화하기보다 단지 손을 뻗어 그들의 사진을 만져보는 것으로 내가 응답―책임―을 대신할 때,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302쪽) 한가운데서 불꽃은 타오른다. 죽어 혼이 된 새의 날개처럼, 미약하면서도 끈질긴 몸짓으로.
검은 나무를 심는 작업을 위해 마련해 둔 땅을 보여주겠다는 인선의 말에 ‘나’는 그를 따라 나선다. 두껍게 쌓인 눈에 인선이 남긴 발자국만을 밟으며, 이들이 도착한 곳은 4·3 당시 전부 불타 폐촌(廢村)이 되어버린 마을이 보이는 강기슭이다. 인선은 그곳에 서서 때로 강 건너를 바라보던 엄마의 이야기, 그리고 치매에 걸린 그녀와 함께 지내며 학살 사건의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을 하는 인선의 얼굴이 촛불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광경을, 나는 지켜본다. 그의 말 속에서 인선은 기억을 잃어 가는 엄마와 한 몸이 되었다가 다시 풀려나옴을 반복하며 엄마의 세계와 그 자신의 세계, 1948년의 제주와 70년도 더 지난 현재의 제주를 넘나들고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 환영과 실재, 악몽과 현실, 낮과 밤의 경계를 넘어 다니며 제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기어코, 그들이 오고 마는 것이다. ‘절멸’을 목표로 학살당한, 유골의 형태로 어딘가에 묻혀 있었을 아이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인선은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318쪽)을, 그를 끈질기게 유혹하던 죽음의 한끝에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318쪽) 것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강 너머 죽음의 마을이 되어버린 그곳이 한순간 예전의 모습처럼 생명의 기운을 띠는 것을 보았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그것은 ‘이곳’의 기슭과 그 너머의 ‘저곳’을 수차례 건넘으로써 ‘견딤’을 지속해 온, 실패한 애도에 굴복하기보다 그 실패로부터 비로소 어떤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것을 끈질기게 믿는 이들의 윤리이자 그 자체로 삶이기도 하다. 인간의 연약함으로부터 가장 거대한 폭력에 균열을 낼 ‘인간적인 것’을 발견하는 인간의 힘. 깊은 바닷속과 같은 무저갱의 어둠을, 일렁이는 초의 불꽃이 밝혀내듯 말이다.
5. 아직, 인간인 것들을 향해
결론에 이르러 이 글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고자 한다. 권력의 프레임 속에서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 삶들은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의 상실은 상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담긴 애도와 문학적 재현, 나아가 삶과 죽음, 고통에 대한 사유를 에둘러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1948년의 제주나 1980년의 광주를 끌어안으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여기 역시 특정한 삶과 죽음을 식별하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산출하는 고통이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되묻는 동시에 이 소설이 남긴 윤리의 잔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살아 있지만 산 것이 아닌’ 상태의 삶들은, 뒤집어 말하자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 아니, 아직 인간인”(302쪽) 존재들이 아닌가? 우리는 타자의 재현에 언제나 실패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패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다. 아니, 때때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실패로부터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을 어떻게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일지도 모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다시금 시작하기 위해 ‘견디는’ 사람들의 소설이다. 스스로의 실패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새로운 ‘쓰기’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또는 고통의 분유(分有) 가능성을 열어 놓는 소설가 한강의 견딤이자, 무수한 죽음(들)을 건너며 애도와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견뎌 온 경하와 인선, 정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이 부디 이들의 견딤에 대한 무례가 되지 않기를. 나아가 한강의 소설 세계를 작게나마 더듬어 보려는 몸짓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며, 소설이 ‘불꽃’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마친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325쪽)
◆당선소감-이지연 “한강 소설서 느낀 문학의 힘… 뜨겁게 견디며 쓸 것”
새벽만 되면 말들이 끓어오르곤 했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그것들을 담아낼 곳이 없어 방황했었다. 무뎌지고 싶지 않으나 무디지 않으면 세계의 가속(加速)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버려진 말들과 함께 맨 뒤에 남아 언제나 황망했다.
한강의 소설은 그런 나에게, 무뎌지지 않은 말들이 어디로 향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의 책에 새겨진 끈질긴 ‘쓰기’의 사투가 나를 일깨웠다. 허무와 냉소로 침잠하다가도 불현듯 일렁이는 빛의 흔적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덕분에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건져 올리는 문학의 힘을 나는 믿는다.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연남경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광대한 문학의 지반 위 비평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곧게 놓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아낌없는 애정과 지도를 건네주신 이화의 선생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 김주연 선생님께, 그리고 세계일보사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생의 가장 큰 조각을 물려주신 엄마와 늘 그곳에서 묵묵히 기다려주신 아빠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동생 승헌에게도, 고맙다. 항상 옆에서 손잡아 준 대학원 선후배들에게도 무한히 고맙다. 서툰 나를 늘 같은 자리에서 믿고 기다려주는 소중한 친구들. 따뜻한 말과 포근한 위로를 전해 준 내 곁의 모든 이에게, 깊게 묻어 둔 마음을 보낸다.
『검은 사슴』을 처음 읽던 날을 떠올린다. 짙게 깔린 어둠과 폐허와 죽음의 흔적으로부터 어쩐지 물컹한 온기를 느꼈다. 그것의 출처가 견디어내는 삶, 에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도 다는 알지 못한다. 다만 더듬으며 나아갈 뿐이다. 지독하게 잔혹한 세계와, 그럼에도 끝내 견딤으로써 가능해지는 어떤 삶-쓰기의 윤곽을.
그러니 새삼 속삭여 본다. 멀리까지 외치기에는 나의 음성이 너무나 볼품없는 탓이다. 멈추지 않겠노라고. 차갑게 가라앉는 대신 뜨겁게 견디며 쓰겠노라고.
유독 추웠던 근래의 밤이, 조금은 덜 추워지기를 바란다.
●1990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수료 △현재 대학 출강 중
◆심사평-김주연 문학평론가 “세밀한 읽기 통한 의미 제시… 겸손한 문체 인상적”
한강을 다룬 3편의 응모작은 모두 당선권에서 각축을 다투었다.
선배 소설가 최윤을 함께 분석한 ‘부재하는 주체, 분화하는 화자―최윤, 한강의 여성적 글쓰기와 애도’(정서화)도 훌륭한 글이었지만, 한강 소설가 한 사람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2편의 평론 ‘화려한 숨결의 날갯짓―한강론’(한지우)과 ‘죽음(들)을 건너는 ‘견딤’의 윤리―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읽기’(이지연)는 비평이 소설 텍스트와의 공감대 위에서 펼쳐질 때, 확실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수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당선작으로 결정된 이지연씨의 평론은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세밀한 읽기를 통해서 그 의미를 차분하게 제시함으로써 소설이 주는 감동을 훼손하지 않고 추가한다.
소설이 남긴 “윤리의 잔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는 타자의 재현에 언제나 실패한다”고 적어놓고 이때 드러나는 진실을 새로운 시작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기를 담담하게 제언한다. 겸손한 문체는 오히려 평론의 담대한 힘이 된다. 이씨에게 당선을 양보한 한씨의 작품도 감각적인 문체와 함께 단문으로 된 문장의 흐름이 한강 작가의 소설과도 어울리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비문(非文)이 적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여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관찰된다. 그 하나는 시, 소설, 평론 등 모든 분야에서 여성작가들의 대거 진출이다. 다음으로는 그들이 다루는 테마가 여성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여성문제라는 것은, 관습과 윤리, 이념 등에서 소수자의 자리에 여성이 위치해 있다는, 즉 억압받는 자라는 문제의식의 전면적인 현실상징으로서 나타난다.
가령 이번 응모작들 가운데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3편은 물론 ‘다시 낡은 것이 되기 전에: 여성의 결속과 분열 사이’(박다정), ‘우주의 음기, 무당이자 폴터가이스터로 존재하는 여성주의 시들’(정여진)은 이러한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