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번 버스가 잠시 후 도착합니다.”
경기 화성시의 한 버스 정류장. 승객 편의를 돕기 위해 버스 도착을 미리 알려주는 음성안내시스템의 소리가 정류장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보통 사람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런 일상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청각장애인을 포함한 난청(難聽) 시민들. 보청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집 밖에서는 보청기를 착용해도 주변 사람의 대화 소리, 차량이나 생활 소음 탓에 보청기로도 맑고 깨끗한 소리를 듣기 어렵다.
기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보청기를 직접 체험했다.
보청기나 인공와우의 텔레코일이 활성화하려면 특수음향기기와 자기장 신호를 전달하는 루프케이블(loop cable)이 필요하다. 바로 이 특수음향기기와 루프케이블이 설치된 장소가 텔레코일존이다. 텔레코일존을 설치하려면 면적에 따라 350만(66㎡ 이하)∼800만원(330㎡ 이하)의 특수음향기기와 3.3㎡당 5만원의 루프케이블이 소요된다.
난청인은 이렇게 설치된 텔레코일존에서 보청기 등의 ‘T(텔레코일) 모드’를 활성화해 마이크 소리, 방송 소리 등만 증폭해 들을 수 있게 된다. 텔레코일존은 난청인이 보청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맑고 고운 소리를 제공하는 공간인 셈이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히어링 루프(hearing loop), 인덕션 루프(induction loop) 등으로 알려진 텔레코일존에 들어서면 보청기, 인공와우를 사용하는 난청인 모두가 가장 기본적 권리라고 할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린다.
30개국은 설치 장소의 소리 인식률이나 극장, 공연장, 회의실, 예배당 등에서의 사용 경험, 만족도 등에 대한 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미국에선 장애인법(ADA)을 통해 다양한 공공장소에서 시스템 설치를 의무화하고 불이행 시 벌금 및 기타 법적 제재가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州)에서는 보청기 구매자에게서 히어링 루프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는 확인까지 받도록 의무화되어 있다. 영국은 건축 규정 자체에 회의실, 강의실, 공연장 등 다중이용시설에 청각증강시스템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시민에게 텔레코일존은 낯선 존재다. 보청기, 인공와우를 사용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보조기구에 텔레코일 기능이 있는지 모른다.
텔레코일존 설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법령도 없고 텔레코일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없다 보니 업체도 아무런 설명 없이 보청기나 인공와우를 판매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텔레코일존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외국처럼 법령·조례와 예산 등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절실한 대목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공공건물·공중이용시설에 보청기 전용방송장치 설치, 교통사업자에 대한 청각보조서비스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하는 관련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임기 만료 후 폐기됐다.
송재명 한국난청인교육협회 기술자문위원은 “군 복무 때 포사격 등으로 후천적 난청을 얻은 동료를 많이 봐왔다. 청각 장애는 후천적 원인이 77.8%(보건복지부 2020 장애인실태조사 기준)”라며 “특히 70세 이상의 시민 중 68.4% 정도가 청각 장애를 갖게 된다. 초고령사회(인구의 20%가 65세 이상)에 진입하면서 텔레코일존의 설치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의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