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 뉴욕 트럼프 타워 로비에 나타나 취재진 앞에 섰다. 트럼프가 친근한 손짓으로 누군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었다. 트럼프는 손 회장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가 미국에 500억달러 투자와 5만개 일자리를 약속했다고 자랑했다. 대권을 거머쥐었지만 트럼프를 여전히 ‘이단아’ 취급하던 시절이다.
트럼프의 브리핑은 단 30초였다. 그 찰나의 시간 손 회장의 행동은 놀랍다. 트럼프 옆으로 바짝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문건을 펼쳐 보인다. 문건에는 소프트뱅크와 협력사 폭스콘이 쓰여 있다.
이듬해 7월 폭스콘은 위스콘신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다. 바로 손 회장이 성사시킨 거래다. 2018년 기공식도 트럼프와 함께 참석했다. 손 회장이 “내가 당신을 (당선) 축하했던 첫 CEO(최고경영자)였다”고 강조하자, 트럼프는 “그건 사실이다. 맞다”고 화답했다.
2024년 12월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당선 후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절이 달라졌다. 트럼프는 “첫 임기에는 모두 나와 싸우려 했다. 이번 임기에는 모두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손 회장이 옆에 섰다. 위상이 달라졌다. 사실상의 공동 기자회견이었다. 11∼12월 마러라고를 찾은 수많은 CEO는 서지 못한 자리였다. 손 회장은 마이크 앞에 서서 미국에 1000억달러를 투자하고, 10만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2016년의 딱 두 배다. 손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두 배로 강력해진(double-down) 대통령이다. 그래서 저도 두 배로 노력하려(double down) 한다. 그게 제 자신감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2000억달러로 판돈을 올리라(double down)고 요구한다. 손 회장은 “당신은 대단한 협상가”라고 치켜세운 뒤 “노력하겠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다시 딜의 여지를 남긴다. 철저한 협상가 대 협상가의 대화다.
2016년 손 회장이 트럼프를 찾아가기 두 달 전 그는 1000억달러 규모의 비전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한 상태였다. 그것도 60%는 사우디국부펀드 등 중동국가에서 조달했다. 손 회장의 약속은 사실 ‘투자 연금술’에 기반해 원래 하려던 것을 좀 더 늘리거나 재포장한 것이었다. 올해 파산 직전까지 갔던 위워크가 가장 큰 수혜자였다. 손 회장이 2024년에 약속한 1000억달러는 주로 반도체, 에너지,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에 집중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역시 그가 당초 설정한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손 회장은 지난 10월 미국 투자사 아폴로와 200억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가 얻어낼 것은 많다. 현재 소프트뱅크의 핵심 자산은 반도체 칩 설계회사 ARM이다. 반도체는 차기 트럼프 행정부의 보조금 및 관세 정책에 가장 예민한 산업이다. 강제 매각 위기에 몰린 틱톡에 소프트뱅크는 2018년 30억달러를 투자해 지분을 갖고 있다.
닛케이 보도에 따르면, 손 회장은 지난 11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손정의육영재단의 연말 모임에서 “일론 머스크 같은 상식을 뛰어넘는 인물이 미국을 개혁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사례 중 하나다. 일본도 돌파형 인간을 칭찬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위험을 감수하고 수시로 찾아오는 실패를 능숙하게 다뤄내는 데 이골이 난 리더다. 그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구절을 재해석해 25글자의 한자표로 구성된 ‘손의 제곱 법칙’을 만들었다. 손 회장은 승리의 법칙으로 ‘70%의 법칙’을 갖고 있다. 명장이라면 이기기 쉬운 기회는 꼭 잡아야 하는데 그 기준이 승률 70%다. 50%는 너무 위험하고 90%는 너무 늦다. 손 회장은 비전펀드2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승자 옆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