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모든 것들을 기리고자 하는 열망이 미술의 첫 이유이지 않았을까. 그것이 구체적인 형상이든, 관념적인 추상이든 말이다. 떠난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란 한편 남은 삶을 영속하기 위한 의지이기도 하다.
김주리(44)와 안경수(49)의 2인전 ‘무덤들’(기획 권혁규)이 지난달 21일부터 서울 계동 소재의 미술관 뮤지엄헤드에서 진행 중이다. 전시는 각각 조각과 회화로 구현된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죽음’과 ‘소멸’ 등의 열쇠말을 통하여 들여다본다. 오늘날 도시 풍경으로부터 지워진 대상들, 잊히거나 추방된 존재들을 반추하는 조형 언어를 매개 삼아 전시공간 안에 ‘무덤’을 자처하는 장면을 제시하는 시도이다.
◆김주리: 소멸과 생성의 소조
◆안경수: 장소의 유령이 머무는 화면
안경수는 도심과 교외를 오가며 목격한 풍경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소들을 회화의 화면 위에 꾸준히 옮겨 왔다. 작가가 ‘부유하는 풍경들’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장면들은 기억되지 못하여 없는 곳이 되어 버린 주변부의 자리들이다. 전시공간의 한 벽면을 가득 메운 회화 ‘유치원과 화원’(2024)은 서울 보광동의 면면을 기록한 일련의 작업 중 하나로, 폐허가 된 장소의 옛 이름을 부른다.
거대한 규모의 화면은 잠시 동안 전시공간 안에 건물이 현현한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다만 착시 속에서 장면 가까이 들어설수록 그 환영은 낱낱이 부수어진다. 평면 위에 유려하게 자리 잡은 붓의 자국들, 재단한 듯 예리한 직선과 즉흥적으로 떨구었을 물감의 흔적들은 다가서는 발걸음마다 추상적인 흔적으로서 흐트러진다. 적당한 거리 밖으로 물러서야만 본연의 장소에 대한 환영을 드러내는 물감의 겹들이 새삼 생경한 어조로서 되묻는다. 그 외의 무엇을 발견하려 하느냐고. 누구의 기억 속에 스민 풍경이 장소의 유령이라면, 화면 위에 어슴푸레 부유하며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오직 그 유령이다.
실재하는 장소로부터 캔버스 위에 옮겨 온 것은 그리는 자의 기억뿐이다. 결코 원본보다 깊은 층위로 파고들 수 없으나 도리어 없던 겹을 덧입힐 수는 있는 그러한 종류의 기억 말이다. 회화의 언어로 장소를 재현하는 일이란 그렇기에 한편으로 애도의 몸짓이다. 본연의 그곳으로부터 분리된 신체를 행하여, 시시각각 과거의 시간 속에 묻히고 마는 장소의 영혼을 기리는 의식인 것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때로 무덤을 짓는 것과 무척 닮은 행위가 아닐까. 실재하는 장소의 사라짐 뒤에 그 부유하는 풍경들을 회화의 장막 아래 묻는 것이다. 상대와 작별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기억하기 위해서.
‘무덤들’로 명명된 전시공간 내에서 두 작가의 언어는 다각도로 공명한다. 무너지는 것들, 사라지고 잊히는 곳들을 미술의 물성으로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는 장소의 죽음을 증언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보전하는 행위이다. 삶은 한시적이지만 기억은 보다 오래 지속된다. 생을 다한 몸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무덤가를 찾은 이의 마음에 떠난 자의 상이 맺히듯 말이다. 그 무덤은 실제의 봉분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누구의 기억이 묻힌 곳, 어떠한 이미지와 물질이 다녀간 장소들 모두가 일종의 무덤이 된다. 절망이 아닌 애도의 자리이자 소멸 이후의 생성을 담보하는 그러한 종류의 무덤들. 퇴적된 시간의 지층 가운데 무엇을 그리워하는 무덤들이 평면과 입체의 대지 위에 솟는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