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법원이 9일 “‘이첩 중단 명령’은 부당했으며,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따르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수사 외압’ 의혹을 제기한 박 대령 측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이런 수사 외압의 배경에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인데, 공수처 수사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박 대령 측은 중앙지역군사법원이 1심에서 “(이 사건의) 기록 이첩 중단 명령은 특별한 이유가 없고 단지 이 전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를 따르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 전 장관 지시의 목적은 채상병 사건 인계서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한 목적에서 내려진 것으로 보이는바, (이첩 중단 명령은) 정당한 명령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앞서 박 대령은 김계환 전 해병대사령관의 이첩 보류 또는 중단 지시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등 채 상병 사건 관련 책임자들을 축소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 외압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임 전 사단장 등 간부 8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한 수사 결과를 이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2023년 7월31일 오전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며 격노했고 같은 날 경찰 인계 서류에서 혐의자와 혐의 내용을 빼라고 했다는 이른바 ‘VIP 격노설’이 제기됐다.
박 대령 측 김정민 변호사는 “이번 판결과 수사 외압 사건이 직접 관련된 건 아니지만, 결국 이 전 장관이 이첩 보류를 지시한 게 윤 대통령 때문에 비롯됐다는 암시가 충분히 나와 있어 (공수처) 수사에 훨씬 탄력을 받지 않을까 싶다”고 기대했다. 윤 대통령의 격노가 이 전 장관과 김 전 사령관을 거쳐 박 대령에게 이첩 보류?중단 지시로 전달됐다는 점을 법원이 시사했다는 뜻이다.
공수처는 당장 수사를 진전시키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맡고 있는 이대환·차정현 부장검사를 비롯한 공수처 수사 인력 전원은 12?3 비상계엄 사태 관련 윤 대통령 내란 사건에 투입돼 있다.
공수처 관계자는 “현재 (공수처 수사 인력) 전원이 내란 사건에 매달려 있어 수사 외압 사건을 들여다볼 여유가 전혀 없다”며 “판결문 분석을 한 다음 수사 방향이 잡힐 것 같다”고 말했다.
공수처는 지난해 3월 피의자인 이 전 장관의 주호주대사 임명을 계기로 이 의혹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했지만 지난해 4∼5월 유재은 전 국방부 법무관리관, 김 전 사령관 등 주요 피의자들을 조사한 후 수사는 멈춰서 있다. 지난해 11월 “상당 부분 조사가 이뤄졌고 주요 피의자들에 대한 조사도 조만간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12월 내란 사건을 이첩받으면서 사실상 수사가 ‘올스톱’된 상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 전 장관과 윤 대통령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묻고 처벌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