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통령으로 남았으면 역사의 평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몇 가지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에 대통령이 된 그는 재임 기간 의회와 불화했다. 거대 야당은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의회 내 지지 세력은 소수여서 국정은 비틀거렸다. 대통령과 의회는 둘 다 국민에 의해 선출됐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충돌하곤 했다. 정치권은 좌우로 나뉘어 정쟁에만 몰두했다. 국민의 삶은 어려워졌고 정치는 환멸을 키웠다. 소수파 대통령은 군대와 경찰 수뇌부를 심복으로 교체하고 은밀히 포고문과 체포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 와중에 의회가 밀어붙인 법안 하나가 태풍의 눈을 만들었다. 유권자의 투표 자격을 제한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안이었다. 그는 자격 제한을 없애는 법안을 의회에 요구하며 덫을 놨다. 의회가 거부하자 대통령은 거사를 결행했다. 1851년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스 제2공화국 루이 나폴레옹 대통령 얘기다.
200년 가까운 시대적 격차에도 루이 나폴레옹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기도는 정치적 맥락이나 준비 과정이 흡사하다. 결과는 사뭇 달랐는데 두 사람의 정치 수준이 성공과 실패를 갈랐다. ‘보통선거 부활’을 내건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활동을 금지’한 윤 대통령의 시도는 거센 저항을 불렀다. 카를 마르크스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비교하면서 “모든 세계사적 대사건이나 대인물은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소극(笑劇)”이라고 내렸던 평가는 그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적 사상인 국민 주권의 공화주의를 표방했던 인물이었다. 쿠데타 찬반도,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기 위한 결의안도 국민투표에 부쳤다.
그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행위는 시대착오적 퇴행이었다. 건국 이래 쿠데타 세력의 헌법 침탈이 몇 차례 있었지만 ‘1987년 체제’ 이후로 우리 국민은 ‘국민 주권’과 ‘삼권 분립’의 헌법 원칙이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것이란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헌법 준수’를 선서하고 취임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무장 군인을 국회에 투입하며 입법부 장악을 시도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통령이 적법한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며 관저를 요새화하고 중세의 왕처럼 공성전(攻城戰) 태세를 갖추는 시나리오는 드라마 작가에게조차 초현실적이었을 것이다. 15일 체포된 윤 대통령은 이송 직전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체계를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불법적이고 무효인 절차에 응하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선뜻 호응하기 어렵다. 계엄이 선포된 밤, 무장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창문을 깨고 본청에 난입하는 그 순간 헌법 수호자로서의 대통령 지위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다. 윤 대통령이 지키겠다는 헌법과 법체계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