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발발하고 어느덧 106번째 봄을 맞는다. 12·3 계엄 이후 한국 사회를 덮친 갈등과 분열의 쓰나미 속에서 삼일절을 맞으며 제일 먼저 1948년 3월1일의 풍경이 떠올랐다. 해방되고 세 번째 맞은 삼일절의 주인공은 유관순이었다. 그 무렵 전영택이 쓴 전기 ‘순국 처녀 유관순’이 출간되었고, 3월1일에는 윤봉춘이 감독하고 이구영이 각색한 영화 ‘유관순’이 개봉했다. 연극 ‘순국 처녀 유관순 혈투기’도 무대에 올랐다.
3·1운동은 전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이후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지탱하고 독립운동을 추동한 절대적 동력이었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 삼일절은 민족 모두가 함께 경축하는 기념일이 되지 못했다. 1946년 미군정이 3월1일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보신각에서 기념식을 거행했지만 좌익은 남산공원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별도로 삼일절을 기념하는 시민대회를 열었다. 이듬해인 1947년에도 좌우가 삼일절 기념행사를 따로 개최했고, 급기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전국에서 1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3·1운동에서 빛난 민족 통합의 정신을 기쁜 마음으로 기념해야 할 삼일절이 민족 분열을 여실히 드러내는 비탄의 기념일이 되고 말았다.
1948년 3월1일, 미군정은 극도의 경계심으로 3월1일에 일어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런데 대중은 유관순의 전기를 읽고 영화와 연극을 관람하며 삼일절을 기념했다. 영화 ‘유관순’의 관객들은 독립의 염원을 담은 전민족적 항쟁의 상징으로 유관순과 함께 만세를 불렀던 이웃이 옷장 깊숙이 파묻었다가 꺼내 여주인공에게 건네준 낡은 태극기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삼일절을 맞으며 대중은 평범한 10대 여성으로 독립의 대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국열사’ 유관순을 통해 민족 통합의 염원을 표출했다. 그것은 다툼을 마다치 않는 현실 권력에 대한 강한 질타였다. 영화 ‘유관순’의 제작자 방의석은 “다 같이 반성하고 참회해서 선열과 애국지사의 뜻을 받들어 삼팔선을 우리의 손으로 부수고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서 한데 뭉치자”라는 절규에 가까운 제작 소감을 남겼다. 하지만 1948년 삼일절에 분출했던 대중의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