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베티나 슈탕네트/이동기·이재규 옮김/글항아리/4만8000원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가 2011년 출간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 14년 만에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저자는 같은 독일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주창한 ‘악의 평범성’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렌트는 1961년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담당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지켜본 뒤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도 비판적 사고가 결여될 때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봤다. 아렌트가 처음 쓴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책임 의식 없이 상부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대중이나 관료제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용어로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아이히만은 단순히 명령만 수행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치즘에 대한 확신을 통해 적극적으로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이히만이 직접 적은 문서와 전범 재판 과정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아렌트와 달리, 저자는 아이히만이 전쟁 이후 아르헨티나로 망명해서 남긴 녹취록과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심문 기록 등 총 8000쪽에 달하는 자료를 분석했다. 특히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언론인 빌럼 사선과 나눈 인터뷰 녹취록 1300쪽 분량이 기존 연구를 뒤집는 증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