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면류관 쓴 예수처럼 보이는 얼굴이 관람객을 맞는다. 퍽이나 강렬하다. 물감 아닌 커피로 그려진 그림이라서 더욱 흡인력이 크다. 작가 고영우(83)의 1978년작 ‘무제’다. 또 다른 작품 ‘너의 어두움’ 속 얼굴 역시 인상 깊다. 세상 모든 수심을 헤아리고 있는 젊은 예수 얼굴 같다.
서귀포 출신 고영우는 ‘우울한 환상’ ‘흔들리는 존재, 너의 어두움’ 등을 주제로 40년 넘게 ‘인간 내면’에 천착해왔다. 인물화를 주로 그리게 된 이유다. 그 인물들은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그가 바라본 인간에 대한 사유이자 성찰의 흔적들이다.
작가는 공황장애로 60년 이상 고통받아 온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색하며 그림을 탈출구로 삼아왔다. 그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서귀포의 구시가지 ‘솔동산’ 일대 터전을 중심으로 반경 3㎞, 멀게는 5㎞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서귀포에서 제주시를 가 본 것도 60년 전 일이다. 이 같은 작가의 삶과 작업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굳이 인간의 불안이나 어두움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무얼까.
“슬픔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이면서 극히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 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어두운 공간, 그 영역의 모호한 대상에 보다 조금씩 접근하는 과정이에요. ‘너의 어두움’은 그 누구나 품고 있는 영역의 이면입니다. 동굴에 깊이 들어갈수록 어둠이 깊어지듯,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어두움이 존재하는데, 나는 인간의 어두움에서, 눈물에서 선한 것을 봅니다.”
화풍의 변화도 흥미롭다. 초기 크레파스 작업이 작가의 내밀한 감정을 다양한 색과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했다면, 2010년대에 들어서면 단순화된 직선의 수백 명 인물 군상이 모노톤의 색면 형태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크레파스 작품은 1974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20년 이상 몰두한 작업입니다. 크레파스화로 첫 개인전(1976)을 열기도 했죠. 당시는 물감을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라, 크레파스를 가지고 다양한 기법을 실험했어요. 덧칠하고, 지우고, 겹치고, 문지르고, 긁어내고…. 칼로 긁는 선(線)의 예리함이 좋았습니다. 이때 선의 아름다움을 알았는데, 그 행위가 훗날 드로잉 작업에 도움이 됐죠. … 크레파스 작품을 세밀히 살펴보면, 인물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덮기도 했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숨겨진 인물들을 볼 수 있어요. 지금까지도 인물들을 그리고 덮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그때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노톤의 인물 군상 ‘너의 어두움’(유화)은 바쁜 일상에 쫓기며 획일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을 보여준다. 직립한 채 서로 소통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의 목표만을 지향할 뿐이다. 경쟁은 고립과 불신을 낳고 상실과 고통, 슬픔을 초래한다.
고영우는 ‘종지기’ 화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그림과 신앙은 그를 떠받치는 두 축이 되었다. 방치된 성당의 종을 지난 45년 동안 오후 6시면 어김없이 쳐왔다. 이러한 행위를 그는 “병약한 나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만종의 소리는 그에게 ‘감사의 경배’이자 ‘생명에 대한 고귀함, 삶에 대한 예찬의 메시지’인 셈이다. 이는 작가가 그림을 통해 전하고 싶은 바람이기도 하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 고(故) 고성진(1920∼2016) 화가는 일본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한 제주 1세대 작가이자 시인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 철학에도 눈을 떴다.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은 그가 ‘인간 내면’에 대한 인식과 탐색에 깊이를 더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내 작품의 주된 대상은 ‘인간’입니다. 왜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그리지 않느냐고도 묻습니다만, 팔리는 그림보다는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늘 “굶어 죽더라도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되지 말아라”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고영우의 45년 미술세계를 담은 기획전이 5월31일까지 제주시 조천읍 제주돌문화공원 안 갤러리 누보에서 펼쳐진다. ‘Layers of Fantasy ― 환상에 대한 환상’이란 주제를 내건 전시회는 1980∼1990년대 크레파스 작품과 드로잉, 2000년대 이후 유화로 그린 모노톤의 인물 군상 시리즈 등 5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예술을 향한 고영우만의 뚝심과 독특함이 담긴 작품들이 관람의 전율을 안겨준다.
송정희 갤러리 누보 대표는 “작가 고영우를 아끼는 다수의 소장자가 작품을 선뜻 내주어 이번 전시가 성사될 수 있었다”며 “소장자 한 분 한 분을 만나 소장 연유를 채집하는 등 작가에 대한 아카이빙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전시 기간 동안 ‘소장자들과의 대화’ 자리와 전시해설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