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교체를 이루고 국가통합을 이루려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
2017년 2월1일, 범보수 진영의 유력 대선주자로 꼽혔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0년간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 대권 도전 의사를 표명한 지 불과 20일 만이었다. 평생 외교 관료로 살아온 반 전 총장은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검증 공세와 의혹을 견디지 못했고, 정치력 부재와 전반적인 준비 부족 등이 겹치며 결국 무릎을 꿇었다.
대선을 채 50일도 남기지 않은 15일,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국무총리의 대선 출마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2017년 조기 대선 국면에서의 반 전 총장을 포함한 이른바 ‘올드보이’들의 대선 도전과 실패 과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사태에서 양대 정당의 기성 정치인이 아닌 ‘제3지대’에서 관료나 행정가 등 안정적인 인사가 대선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되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뒤따른다.
한 권한대행을 향한 출마 요구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로 당시 유력 대선 주자였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에 맞서 ‘제3지대 빅텐트’ 요구가 쏟아졌던 상황과 닮았다. 다만, 한 권한대행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 파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윤석열정부 실패에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반 전 총장은 당시 민주당 김종인 전 대표, 손학규 국민주권회의 의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과 개헌을 고리로 한 ‘반(反)문재인’ 연대와 후보 선출 등을 구상했지만, 낙마 후 제3지대 논의가 동력을 잃었다. 정 전 총리는 1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4월 불출마를 선언했고, 김 전 대표도 대선을 약 한 달여 앞두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1주일 만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거론됐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국무총리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올드보이들의 대선 출마는 인력·조직·자금 등 거대 정당의 기반 없이 대선을 치르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제3지대를 이끌 구심점과 세력의 부재 역시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약점 중 하나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2017년 대선 당시 반 전 총장 대망론을 포함, 2022년 대선에서 윤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당내에서 대선 후보를 키우지 못하고 ‘용병’ 차출에 의존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은 지난 11일 SBS 라디오에 출연해 “윤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용병론에 관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또 용병론이 나온다면 ‘당신들은 후보를 낼 능력이 없는 정당이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한 재선 의원은 통화에서 “매번 외부에서 후보를 영입하면 당의 자생력이 길러질 수 있겠느냐”며 “아무리 구도가 불리해도 우리 당 후보로 맞서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은 일제히 ‘한덕수 차출론’에 반발하고 있다.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15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가 지지율이 확 떠서 상대 후보를 능가하면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올 텐데, 답답하니까 한 대행까지 차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경선하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조금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이날 SBS 라디오에 출연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홍 전 시장은 “(한 권한대행이 출마하면) 국정운영이 최상목 대행 체제로 또 가야 될 텐데 그걸 국민이 받아들이겠느냐”며 “당 일각에서 하는 걸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됐을 때 반기문 영입하자고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 생각이 난다. 참 어이가 없는 행동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CBS 라디오에서 “일종의 테마주 주가 조작 같은 것”이라며 “(한덕수 차출론) 과정은 패배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