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의 참호전은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참호, 철조망, 기관총, 포병이 결합된 방어선을 돌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교착을 타개할 무기로 등장한 전차는 2차 대전에서 기동전의 핵심으로 진화했다. 대규모 돌파와 부대의 진격을 이끈 전차는 보병 지원을 넘어 전선을 흔드는 주력 전력으로 자리 잡았고, ‘지상전의 왕자’로 불렸다.
2차 대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인 6·25전쟁은 전차의 역사에 또 다른 시사점을 던졌다. 북한군의 T-34 전차가 등장하자, 전차도 없고 이를 막을 대전차 무기도 없었던 한국군은 ‘전차 패닉’에 빠졌고, 서울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서울까지 40㎞ 남짓한 거리에서 T-34의 진격 속도는 의외로 느렸다. 북한군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기보다는 보병과 함께 포위섬멸을 노리는 보전협동 전술을 구사했고, 산악 지형과 좁은 도로, 교통 정체, 오인 진격 등의 요인으로 전차의 기동력은 제한됐다.
이때 미군의 M26 ‘퍼싱’ 전차가 투입된다. T-34와 M26의 성능은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전차전의 승자는 항상 미군이었다. 그 차이는 스펙이 아니라 운용에 있었다. 다부동 ‘볼링 앨리’ 전투에서 미 전차 중대가 보병, 전차, 포병 협동으로 T-34 13대와 자주포 5대를 무력화했듯이, 항공지원과 대전차 무기를 포함한 제병협동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진 전쟁은 아니었다. 119회의 전차전 중 양측이 5대 이상을 투입한 전투는 단 7회뿐이었고, 대부분은 전차 4대로 구성된 소대 단위 전투였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