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간 천경자 그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고 이듬해인 1964년 9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들었으나 실은 동맹인 미국의 집요한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6·25 전쟁 당시 외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켰으니 이제 그 보답을 해야 한다’는 미국 측 주장에 정색하고 반기를 들긴 어려웠다. 더욱이 미국이 전쟁 수행을 이유로 주한미군 병력 일부를 빼내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는 경우 심각한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1973년 3월 철수하기까지 8년 넘게 이어진 파병 기간 동안 연인원 34만여명의 국군 장병이 베트남에서 싸웠다. 그 가운데 5000명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으니 참으로 고귀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힌국 미술계의 거장 천경자(1924∼2015) 화백. 30세이던 1954년부터 20년간 홍익대 미대 교수를 지냈고 1978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 회원이 되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2년 6월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다. 국내 미술계에서 명망 높은 10명을 베트남에 파견하는 내용이었다. 문공부 측은 “주월(駐越) 국군의 특출한 전과와 대민 봉사 활동 등을 그림에 담도록 한 뒤 이들을 모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월남전 기록화 전시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던 이마동 화가를 단장으로 내로라하는 작가 총 10명이 종군 화가단에 참여했다. 모두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물들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당시 홍익대 교수이던 천경자(1924∼2015) 화백이 있었다.

 

낯선 타국의 전쟁터에 도착한 천경자는 육군 맹호부대에 배속됐다. 종군 화가들은 마치 종군 기자와 같이 치열한 전투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거기에서 기록화로 남길 만한 소재를 찾아야 했다. 베트남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화가들은 1972년 12월로 예정된 전시회를 앞두고 저마다 그림 완성에 공을 들였다. 오늘날 천경자가 베트남에서 그린 작품을 소장 중인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당시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대부분이 화가 개인의 화풍과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이전에 제작된 전쟁 기록화를 답습한 반면 천경자는 평소 즐겨 그리는 소재를 반영하여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풍정(風情)을 화폭에 담았다”며 “개성 있는 전쟁 기록화”라고 높이 평가했다.

 

천경자 화백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그린 작품 ‘꽃과 병사와 포성’(197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이 3층 기증실 재개관을 기념해 지난 5월30일부터 특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천경자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 ‘꽃과 병사와 포성’(1972)이 전시물에 포함돼 눈길을 끈다. 그림은 흐릿한 꽃 이미지 속에 소총을 든 군인, 탱크를 몰고 가는 장병,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는 물론 베트남 민가와 나무 잎으로 만든 전통 삼각형 모자를 쓴 현지인들까지 묘사했다. 원래 국방부에 걸려 있었던 이 그림은 2024년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의 삶과 예술’을 통해 처음 대중에 공개됐으며 상설 전시는 전쟁기념관이 처음이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회장 백승주)가 “전쟁이라는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가 개인의 감성과 정체성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만큼 누구든 시간이 될 때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