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현 경제상황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만큼 경기부양 정책이 시급해졌다”고 진단했다. 이 총재가 경기부양책의 조속한 집행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은은 추가경정예산(추경)의 신속한 집행이 필요하다는 입장도 내놨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창립 제75주년 기념식에서 “올해 예상되는 성장률은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를 제외하고는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수준이고, 불과 3개월 만에 연간 성장률 전망치를 0.7%포인트나 낮춘 것 역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달 한은은 올해 성장률 전망을 1.5%에서 0.8%로 하향 조정하고, 내년 성장률도 1.8%에서 1.6%로 낮춘 바 있다.
이 총재는 “한은은 지난해 10월 이후 네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등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도 당분간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구체적 추경 규모에 대해서는 “경제 상황이나 재정 여건 등을 고려해 국회와 정부가 협의해 결정할 사항”이라며 말을 아꼈다. 앞서 이 총재는 1차 추경 편성 전인 지난 2월18일 국회에서 “추경을 15조~20조원 규모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 정치권은 최소 20조원 이상의 추경 편성을 논의 중이다.
다만, 이 총재는 경기부양책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장잠재력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기 위한 구조개혁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에 따르면 2000년대 중후반만 해도 4% 수준이었던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저출생·고령화로 지금은 2%를 밑도는 수준까지 하락했다. 또 높은 수출 의존도로 인해 경기 변동폭이 커지면서 분기별 역성장할 확률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5% 수준에서 지난해 약 14%로 3배 커졌다.
실제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중반까지 분기별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2008년 4분기(-3.4%)뿐이다. 하지만 출생아 수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한 2015년 이후로는 2017년 4분기(-0.2%), 2020년 1분기(-1.3%)와 2분기(-2.7%), 2022년 4분기(-0.5%), 2024년 2분기(-0.2%)에 이어 올해 1분기(-0.2%)까지 이미 6차례에 달한다.
이 총재는 “급하다고 경기부양 정책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사후적으로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실물경기 회복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경고했다. 지난 3월 이후 서울 아파트 가격이 연율 기준 약 7% 상승하고 지난달 금융권 가계대출은 6조원 늘어나는 등 증가세도 확대되고 있다. 이 총재는 “손쉽게 경기를 부양하려고 부동산 과잉 투자를 용인해 온 과거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 중반 수준으로 낮아졌지만, 미국의 금리인하 속도 조절에 따라 내외 금리 차가 더 커질 수 있고 무역 협상 결과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도 커서 외환시장 변동성이 다시 확대될 수 있다”면서 금리 인하를 신중히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새 정부를 향해서는 “충분한 조율과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좋은 정책이라도 이해집단의 저항에 부딪혀 좌초될 수밖에 없다”면서 “구조개혁 과제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리더십을 발휘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