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가 1949년 6월26일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저격당하여 절명하였고 7월5일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채 1년도 안 되어 그가 막으려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하였다. 그래서인지 1980년 5월 이전만 하더라도 가장 침울하고 가슴 아픈 달은 오로지 6월이었다.
특히 백범이 잠들어 있는 효창공원 부근에 살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가끔은 안두희의 배후가 누구일까라는 것보다 백범과 함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안장된 효창공원에 왜 축구운동장이 들어섰을까가 의문이었다. 봄과 가을에는 육해공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비롯한 각종 체육대회가 열리고 겨울에는 스케이트 애호가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 효창운동장으로 몰려갔다. 이들 애국지사는 편히 잠들고 계실까.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우리 남매들이 효창공원을 거닐며 펜스 너머로 목격했던 이들의 묘역은 왜 이렇게 초라할까. 온갖 의구심이 내 뇌리를 스쳐 갔다.
효창운동장은 알다시피 효창공원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리고 효창공원은 효창원(孝昌園)에서 나왔다. 효창원은 원래 효창묘였는데 고종 7년(1870)에 승격된 이름이다. 정조의 맏아들로 5살에 요절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정조에 의해 도성에서 가까운 이곳에 묻혔고 이후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그의 소생인 영온옹주가 묻혔다. ‘효창’은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 군대가 효창원에 불법 주둔한 이래 이곳은 군사 시설로 이용되었다. 이어서 1921년에는 만주철도주식회사가 경성 최초로 이곳에 골프장을 개설하여 3년 동안 운영하였으며 1924년에는 경성부가 시민들의 행락지로 활용한다는 효창공원 설치방안을 발표하였다. 또한 1937년 광장이 없다는 이유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발표하였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