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술을 마시는 방식에는 단순한 취향 그 이상이 담겨 있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 마시는지 들여다보면, 그 사회의 정치 구조, 인간관계의 방식, 심지어 문명의 깊은 층위까지 엿볼 수 있다.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신뢰를 표현하는 도구였고, 동서양은 이 술을 다르게 사용해왔다.
서양의 술자리는 자유롭고 수평적이다.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잔을 부딪치고, 모두가 함께 웃는다. 반면, 동양에서는 술을 마시기 전 복잡한 예절이 따른다. 어른이 먼저 마셔야 하고, 아랫사람은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린다. 이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위계와 질서를 반영하는 행동이다.
이 차이의 뿌리는 ‘신뢰를 맺는 방식’에 있다. 서양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 즉 성경의 ‘언약’을 근간으로 삼는다. 구약 성경의 언약궤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의 조건적 약속을 상징하며, 이는 중세 유럽 봉건제에서도 이어졌다. 왕과 영주, 영주와 기사 사이의 충성 서약은 문서로 남겼고, 위반 시 처벌이 따랐다. 관계는 말이 아닌 기록으로 보장되었고, 신뢰는 계약 위에 세워졌다.
반면 서양은 보리·밀 재배와 목축 중심이었다. 비교적 혼자서도 생활이 가능했고, 유목 문화는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중시했다. 이런 환경은 끊임없는 충돌과 분쟁을 낳았고, 결국 권리와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계약’이라는 개념이 발전했다. 계약서는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였고, 기사도 역시 혼란을 다스리기 위한 질서의 언어였다.
결국 서양은 계약서 한 줄로 신뢰를 보장했고, 동양은 술 한 잔으로 질서를 만들었다. 같은 술이지만, 마시는 방식은 문명의 반영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누군가는 건배를 나누고, 누군가는 두 손으로 잔을 올린다.
그 안에는 수천 년의 문화와 인간관계의 철학이 숨어 있다. 술은 단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이 신뢰를 만들어온 방식이자, 인간이 관계를 맺는 깊은 언어였다.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넷플릭스 백스피릿의 통합자문역할도 맡았으며,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에는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명옥 주류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