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주 경기장. 장내를 채운 관중들은 힘차게 질주하는 선수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42.195㎞를 달린 최종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당시 올림픽은 물론 국제대회에서 ‘마의 30분’으로 불려 온 벽을 깨뜨린 신기록이었다. 그러나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금메달리스트 손기정(1912∼2002)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고, 우승자를 위해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다. 일제 치하였던 당시 국내 언론은 일장기를 지우거나 흐리게 한 사진을 담아 민족 자긍심을 드높인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전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떠들썩했지만, 손기정은 며칠 뒤 작은 엽서에 ‘Korean(코리안) 손긔졍’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우승 직후인 1936년 8월 15일 직접 서명한 엽서 실물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25일부터 12월 28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기증 1실에서 선보이는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를 통해서다. 전시 제목은 1947년 서윤복(1923~2017) 선수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며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써준 휘호 ‘족패천하’(足霸天下)에서 따왔다. 서윤복은 손기정의 제자다.
박물관 측은 24일 “조국을 가슴에 품고 달렸던 손기정 선수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제자들, 1988년 서울에서 성화를 봉송했던 순간 등을 담았다”고 밝혔다.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투구를 기증했다. 투구는 현재 상설 전시 중이다.
전시에서는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한 ‘그날의 영광’도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은 1936년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청년 손기정의 모습부터 1947년과 1950년 ‘KOREA’ 이름을 달고 세계를 제패한 그의 제자들,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노년 손기정 등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박물관은 “어려운 시대 상황에도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 손기정 선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의 의지와 신념을 되새기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