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해 10월 초 한국 측 경제사절단으로 필리핀을 방문한 자리에서 외신을 만나 이같이 말했다. 그동안 삼성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와 시스템LSI(반도체 설계) 사업 부진이 이어지면서 두 사업의 분사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된 가운데, 한때의 ‘반도체 제왕’ 인텔마저 경영 악화로 파운드리 분야를 분사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던 시점이었다. 이 회장은 “(이들 사업을) 분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며 일각의 전망을 사실상 일축했다.
9개월 뒤인 28일 삼성 파운드리는 총 22조7648억원 규모에 달하는 공급 계약을 공시했다. 삼성전자가 ‘단일판매·공급계약체결’(수주)을 별도 공시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다.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사는 전년도 매출액의 5%를 넘는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면 공시해야 하는데, 연 매출이 300조원에 이르는 삼성전자로선 의무 공시 조건이 무려 15조원에 달해 해당 공시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계약 금액은 지난해 삼성전자 총매출액(300조8709억원)의 7.6%로 의무 공시 대상에 오른 것이다.
이 회장이 파운드리 분사설을 일축할 당시 삼성 파운드리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TSMC의 시장 점유율은 62.3%로 삼성(11.5%)보다 50.8%포인트가 높았다. 올해 1분기 점유율은 TSMC가 67.6%, 삼성전자가 7.7%로 격차가 무려 59.9%포인트까지 확대된 상황이다.
악화일로 중에도 이 회장이 파운드리 사업을 고수한 배경엔 확고한 비전이 자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회장은 2019년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내놓으며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만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또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2021년에는 기존 계획에 38조원을 더해 총 171조원으로 투입액을 늘렸다.
머스크 CEO는 테슬라의 기술로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의 운영 효율화 개선에 나설 것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는 “삼성은 테슬라가 (테일러 공장의) 제조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 동의했다. 내가 직접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진전 속도를 높일 것”이라며 “(테일러 공장은)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말했다. 머스크 CEO는 또 이번 계약과 관련해 한 엑스 이용자가 ‘올해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뉴스’라고 말하자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2∼3년 뒤에는 분명해질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테슬라의 전략적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번 계약은 이 회장이 지난 17일 대법원 판결로 ‘사법 족쇄’를 완전히 풀어낸 뒤 11일 만에 발표된 초대형 계약이라는 의미도 더해졌다. 이 회장의 경영 공백 중 ‘삼성 위기론’이 불거졌고, 그 기저에는 반도체 경쟁력 저하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삼성 파운드리는 최근 몇 년간 매년 수조원의 적자를 내면서 ‘아픈 손가락’을 면치 못했는데, 이 회장이 경영에 온전히 복귀한 직후 삼성전자 역대 최대 규모 계약이 성사되면서 이 회장으로선 가장 큰 숙제의 일부를 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