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맞았다. 빼앗긴 땅이 제 모습을 되찾던 날, 대지는 희망의 물결로 요동치며 갈 곳 잃은 발걸음을 품어 안았다. 그러나 곧이어 찾아온 전쟁과 분단,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기쁨과 환희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폐허가 된 도시와 들판에는 피난민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새겨졌고, 수많은 이가 숨죽이며 아픔을 삼켜내야 했다.
비록 개인의 한숨과 눈물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시대의 증언가인 예술가들을 통해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들은 폐허 위에서도 붓과 물감을 들고 때로는 상실과 절망을, 때로는 희망과 염원을 그려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와 송현숙(73)의 예술 세계에는 아픔을 넘어 근원으로 회귀하려는 의지와 자유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김환기: 태고의 감각을 향하여
◆송현숙: 흙의 심연으로부터
송현숙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갔다. 새로운 세상과 자유를 꿈꿨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그림을 그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그린 습작들을 가지고 4년 뒤 함부르크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하며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화면에는 횃대와 말뚝, 고무신, 항아리, 삼베와 모시, 명주실 등 한국 전통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전남 담양의 산골 마을에서 어머니와 누에를 기르고 명주 실을 뽑던 기억, 마당 빨랫줄에 걸린 눈부신 하얀 천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자연스레 그의 화면에는 따스하고 포근한 시골의 정취, 소박한 생활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그는 화려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내면을 단단히 하고 인내하는 일을 덕목으로 삼는다. 그래서 작품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명을 다하는 농부의 마음이 엿보인다. 이를 반영하듯 작품의 배경은 흙바닥을 연상시키는 갈색이나 흙과 풀이 얽혀 있는 듯한 녹갈색, 때로는 심연을 떠올리는 검은색으로 채워진다. 흙을 닮은 색채는 내면으로의 귀환을 촉발하며,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과 시대의 고통을 녹여버리는 근원적 휴식의 감각을 불러온다.
송현숙의 작업에는 한국의 전통과 서양 문화가 자연스레 융화되어 있다. 달걀 노른자에 물감을 섞어 투명한 표면을 구현하는 서양의 템페라 기법을 사용하는 동시에, 한 획에 모든 정신을 쏟는 동양의 일필휘지(一筆揮之) 태도를 견지한다. 2008년부터는 분청사기 장식에 사용하는 귀얄 붓을 사용하고 있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깊이를 더하는 귀얄 붓은 투박하지만 동시에 투명하고 섬세한, 상반된 두 성질이 공존하는 화면을 탄생시킨다.
오로지 몇 획의 붓질로 완성되는 송현숙의 작품은 그 간결성으로 인해 추상적 인상을 지니기도 한다. 그는 회화 양식을 구축하던 초기, 자신의 아련한 기억들을 글이나 언어가 아닌 형상의 이미지로, 특히 선(線)을 사용하여 기호화한 것이라 밝혔다. 따라서, 송현숙의 화면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애도, 타향살이의 애환이 켜켜이 쌓인 기호화된 세계이다. 이러한 회화적 특성은 동양-서양, 추상-구상의 경계를 설득력 있게 넘어선다. 작업의 시작이 되었던 노스탤지어는 도달하지 못한 그리움이 아닌, 흙의 감각으로 영원화된 휴식의 공간으로 승화된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김환기와 송현숙의 작품은 서로 다른 세대와 여정을 지나왔지만, 흙으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하늘을 향한 열망으로 맞닿아 있다. 이들의 붓질 속에는 상처를 끌어안고 회복을 바라보는 자유의 빛이 공존한다.
광복은 단순히 빼앗긴 땅을 되찾는 날이 아니라, 잃었던 자존과 자유를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쌓아가는 여정이다. 그 길목에서 예술가들은 시대의 아픔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아, 인간성을 회복하는 빛으로 세상을 밝혀왔다.
김환기와 송현숙의 예술은 흙에서 시작해 하늘로 이어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와 상처 위에 생명을 틔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광복의 정신-자유, 연대, 회복-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다. 분열과 갈등이 여전히 이어지는 오늘, 다시 광복의 의미를 헤아리며 다가올 시간을 마주할 때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