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쉬워요,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요.” 뉴욕 결혼 정보사의 수석 매칭 매니저 루시(다코다 존슨)는 이렇게 말한다. 셀린 송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머티리얼리스트’는 정략결혼과 연애결혼의 역사 이후 신자유주의 아래 안정적으로 정착한 중매 시스템이 사랑과 인간을 어떻게 수치화하는지를 신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도 루시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며, 우리의 주도에 따라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상처 입히는 것이다.’ 루시는 고객을 시장가치로 평가하는 데 능한 동시에 사랑이 본질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것임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셈이다.
루시의 노트에는 고객이 원하는 ‘완벽한 짝’의 조건이 빼곡히 적혀 있다. 종이에 나열된 조건은 속물주의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준 물질주의자가 우선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순진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그 조건들은 상대가 지금 가진 물질적 가치(외모와 자산)의 이상성을 요구하며 그것의 현재 가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훗날 불운과 사고가 삶에 침투하거나 노화와 질병이 우리 몸에도 스미듯 찾아올 거라는 상상은 여기에 허락되지 않는다.
셀린 송이 묘사한 현대 물질주의자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성, 즉 사랑이 구체적인 타자를 향한다는 성질을 잃는다. 그들은 자산과 배경, 외적 수준과 정치적 동일성과 같은 획일성을 넘어 이해할 수 없고 동화시킬 수 없는 진정한 타자와 만날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에로스적 경험을 상실한다. 물질주의자들은 미래를 꿈꾸면서도 미래의 불행이 차단된 진공상태의 현재성이 사랑을 보증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 주인공은 단순한 물질주의자가 아니다. 루시가 다음 연애 상대에게 바라는 경제적 풍요는 가난한 부모와 과거 연인 존과의 관계에서 학습한 불행 탓이지 속물이어서가 아니다. 경제적 성취를 이룬 뒤 사랑하는 이의 가난은 루시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존은 사랑의 지속성을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해리의 경우 현대 풍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 상대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는 역설적으로 세간에서 원하는 가치(자산과 외모)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연애와 사랑을 통찰하고 있기에 이 분야에 앞서 통찰력을 보인 알랭 드 보통을 떠올리는 일은 쉽다. 그래서 ‘머티리얼리스트’의 연인들에게 필요한 보통의 언어는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당신은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영원히 가질 것으로 나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은 해리에게 이렇게 치환될 것이다. “당신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매력적인 외모와 자산)으로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것(온화함과 겸손함)으로 나를 사랑하는가.” 해리가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면 그 사랑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시험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선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