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미술인들이 집결하는 9월 첫째 주 키아프리즈가 막을 내렸다. 이 시기를 위해 전국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는 1년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전시를 선보인다. 올해 특히 주목할 점은 많은 미술관, 갤러리가 여성 작가들을 조명했다는 점이다. 리움과 호암미술관은 각각 이불과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 속에서 오래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 새롭게 재발견된 힐마 아프 클린트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여성 미술가들의 활약은 이제 낯선 일이 아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앞을 가로막는 장벽은 점점 높아진다. 모두 선대의 예술가들이 길을 터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약 1000년 전,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때에도 묵묵히 지식을 쌓으며 예술적 재능을 펼쳤던 한 인물이 있다. 바로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 이하 힐데가르트)이다.
◆중세의 비전가
◆생명의 푸르름
힐데가르트 사상의 핵심은 라틴어로 ‘푸름, 생명력’을 뜻하는 ‘비리디타스(viriditas)’이다. 자연계 전체에 흐르는 우주의 생명력, 창조와 재생, 풍요를 의미한다. 그는 신성이 자연을 통해 드러나고, 자연은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 생태, 신성이 결합된 독특한 우주관을 형성했다.
이러한 사상은 1151∼1152년쯤 완성된 힐데가르트의 첫 번째 환시 기록집 ‘스키비아스(Scivias)’에서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된다. 총 26개의 신비 체험을 담고 있는 필사본으로, 삼위일체 구조에 맞추어 ①창조와 인간의 타락 ②예수의 구원 ③천국의 도래와 종말론까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목은 Sci vias Domini(“주님의 길을 알라”)에서 유래한다.
1부의 ‘우주의 알(The Cosmic Egg)’에서 힐데가르트는 우주를 생명을 품은 알로 묘사한다. 그 속에는 하늘과 태양, 불꽃과 물이 자리하고, 창조와 재생의 원리가 자궁을 떠올리는 여성적 이미지로 드러난다. ‘비리디타스’는 푸른빛으로 상징되어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함께 빛나는 생의 광희를 드러낸다. ‘우주의 알’은 창조와 종말, 여성성과 신성을 아우르는 힐데가르트 비전의 상징으로 신의 무한함과 영원성을 내포한다.
◆구원의 빛, 새로운 신학
‘스키비아스’의 2부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원자’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힐데가르트는 창세기의 전통적 서사를 변형하여, 사탄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유혹을 준 것이 아닌, 아담이 ‘순종의 달콤한 계율’을 상징하는 꽃을 선택하지 못해 실패한 것으로 묘사한다.
작품은 원형 구조와 찬란한 빛, 구원과 창조를 상징하는 시각적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예수는 황금빛으로 그려져 신의 영광과 광희를 드러낸다. 발밑에는 금빛 세상이 펼쳐져 힐데가르트가 중시한 신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섯 개의 원 안에는 창조의 날들을 담았으며, 붉은 진흙 속에서 인간이 탄생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작품 곳곳에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꽃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함께 봉합된 세상을 절개하여 드러낸 듯한 구도는 ‘우주의 알’처럼 내밀하고 섬세한 여성적 이미지와 생명력을 동시에 환기한다.
힐데가르트는 이처럼 중세의 엄격한 도상 체계를 넘어, 독창적인 구도와 구성, 모티프를 자유롭게 활용했다. 그의 영적 비전은 예술적 시선과 결합되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서사를 구축해 냈다.
◆별자리가 되어
중세 여성 지식인의 상징인 힐데가르트의 업적은 수도원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당대 교황과 왕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시대를 향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수도자로서, 신비가로서 발휘한 그의 영향력은 중세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9월 17일은 그의 축일로 지정하여 오랫동안 기념해 왔다. 2012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諡聖)하고,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는 교회 역사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부여되는 영예로, 그만큼 힐데가르트의 신학적·지적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는 뜻이다.
힐데가르트의 비전은 단순한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시각 언어와 도상 체계로 구체화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기독교 신학과 자연철학, 그리고 중세 우주론을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후대 사상과 예술에도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시대적 제약을 넘어 창조성과 주체성을 증명한 힐데가르트는 중세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자리처럼 남아, 계속해서 새로운 시선과 영감의 길을 비추고 있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