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과 바닥, 천장에 도포된 주황빛 색면은 관람객의 시선을 따라 생동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어느 순간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색면들이 응집과 해체를 오가다 눈부신 원을 그려낸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조르주 루스의 작업은 이렇게 보는 이들의 시선의 궤적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회화가 전통적으로 평면 위에서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켰다면, 루스는 특정한 시점에서만 온전한 이미지가 보이는 ‘아나모르포시스’ 기법으로 3차원 공간에 가상의 2차원적 도형을 그려내며 관객의 움직임을 요구한다. 공간을 탐색하는 과정이 곧 예술 작품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관람객은 작품과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오가고, ‘본다’는 행위를 사유하게 된다. 루스의 색면들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라 시각과 공간, 존재와 인식이 교차하는 철학적 사건이다.
‘서울, 성곡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작품은 성곡미술관 개관 30주년이라는 맥락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루스는 성곡미술관을 프레임 삼아 작업을 펼쳤다. 이 작품 외에도 전시실 전체를 하나의 강렬한 회화적 구조로 전환한 ‘서울, 성곡Ⅱ’까지 장소의 시공간적 흔적을 품은 채 관객의 발걸음 위에서 탄생했다. 미술관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예술적 오마주이자, 이 장소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시각적 사건을 창조한 작품이다.
전시장 내부는 물론 조각정원, 미술관이 자리한 동네의 골목과 주변 풍경, 계절의 변화, 일상의 소리 등 미술관에 쌓인 30년의 흔적은 작가들의 탐구 대상이 됐다. 이들은 미술관의 공간성과 일상성에 주목하면서도, 그 위에 켜켜이 쌓인 물리적 층위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정서적 기억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각자의 시선을 회화, 사진, 설치, 영상, 사운드, 텍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면적으로 풀어냈다.
먼저 김태동은 ‘성곡미술관 전시 아카이브 1995-2025’에서 그동안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도록과 포스터를 아카이브로 펼쳐 보인다. 일반 관객들은 볼 수 없었던 숨겨진 공간들과 미술관 정원의 풍경, 미술관을 방문했던 관객들의 사진 등도 수집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전시의 초입에는 이세경의 도자가 놓여 있다. 머리카락이라는 낯선 재료를 도자기 접시에 문양처럼 배열해온 이세경은 박문순 성곡미술관 관장의 머리카락을 사용해 미술관의 전경 등을 만들어내며 미술관의 역사와 정체성을 응축해냈다.
이창원의 ‘성곡의 조각들’은 나무 구조물에 커피 가루를 얹어 성곡미술관 조각정원 이미지를 형상화한 설치 작품이다. 불안정한 물질이 빛과 그림자 속에서 견고한 조각처럼 드러남으로써 30년 세월의 흔적과 예술의 지속성을 환기한다.
성지연은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바라보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감상 행위는 몰입이자 동시에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역할 수행이다. 작은 정원을 품은 이 조용한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골똘히 작품을 바라보는 모습을 성 작가는 사진으로 찍었다. 관람객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이들이 미술에 몰입하는 순간과 미술관의 공간이 어우러져 근사한 작품으로 탄생했다. 그야말로 미술관의 역사가 미술이 된 셈이다.
이 밖에 김수영의 ‘성곡미술관’, 송예환의 ‘풍수 수확’, 김준의 ‘잔상의 정원’, 민재영의 ‘도시·전시·정원’, 베로니크 엘레나의 ‘풍류’ 시리즈, 윤정미의 ‘성곡미술관 조각정원’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공간과 역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다. 전시는 12월7일까지다. 유정미 작가의 사진 워크숍, 하계훈 미술평론가의 강연,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트학교와 함께하는 도슨트 실습 등 다양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