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연재가 시작된 일본 만화 ‘원피스’가 최근 새삼 화제다. 5억부 이상 팔려 기네스북에 오른 만화책이지만, 최근의 화제를 만든 건 만화 자체가 아니라 이 만화 속에 등장하는 해적깃발이었다. 시작은 지난 8월 벌어진 인도네시아 시위. 정부가 국회의원들의 주택수당을 터무니없이 높이자 분노한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의 손에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와 그 동료들을 상징하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밀짚모자를 쓴 해골 깃발이 들려 있었다.
시위 앞에서 결국 인도네시아 정부는 주택수당 인상을 철회했다. 하지만 해적깃발의 행렬은 인도네시아에서 멈추지 않았다. 9월 초, 네팔 정부가 인스타그램, 유튜브, 엑스(옛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를 차단하자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시위대들의 손에 들린 것도 원피스의 해적깃발이었다. 우연찮게도 9월 한 달간 필리핀, 프랑스, 파라과이, 페루 등 세계 각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동일한 원피스 깃발이 등장했다. 어느 나라에도 배후 세력은 없었는데, 모든 나라의 주동 세력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각국의 Z세대였다. 대략 199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소년기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자란 세대 말이다.
대중문화 속 상징은 종종 정치 시위에 사용돼 왔다. 하지만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동일한 상징이 쓰인 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들이 사용한 원피스 해적깃발은 Z세대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내게는 ‘K컬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인인 우리는 BTS와 불닭볶음면, 케이팝데몬헌터스와 오징어게임 등이 세계에서 인기를 끈다는 뉴스를 확대재생산하며 세계가 한국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 세계가 한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세계의 Z세대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소셜미디어라는 동일한 창 속의 다양한 문화를 사랑할 뿐이고, 우연히 그게 때로는 BTS였고, 때로는 원피스였을 뿐이다.
김상훈 실버라이닝솔루션즈 대표